「실크로드와 둔황」 전시회 관람기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용산구 (2011.3.17)
1300년 만에 귀향하는 「왕오천축국전」을 보러 국립박물관에 갔다. 혜초가 「왕오천축국전」을 쓰고 난 뒤에 혜초나 그 기록물은 고국에 온 적이 없다. 혜초가 이 글을 쓴 것이 727년이니 세월이 많이 되었다. 2010년 5월 실크로드 여행을 가서 둔황에 있는 막고굴에서「왕오천축국전」이 처음 있었던 자리인 텅 빈 17호 동굴 장경동을 보고, 작년말에는 정수일이 쓴「왕오천축국전 역주본」을 읽었는데, 이제 그 원본을 보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
「왕오천축국전」을 처음 발견한 것은 1908년 프랑스 사학자 폴 펠리오였는데, 그가 읽었던 책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에서 나왔던 글귀를 기억하고 「왕오천축국전」 임을 알았다는알았다는 것이다. 전시회는 둔황을 중심으로 실크로드 일대의 생활문화사와 「왕오천축국전」과 자료가 발견된 장소인 막고굴 주변, 그리고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연관 문화유적을 전시하고 있었고 전시장도 그러한 순서로 꾸며 놓았다.
한국 최초로 세계에 눈 뜬 혜초는 열여섯에 서라벌을 떠나 당나라로 갔고, 열아홉에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다. 오천축(동, 서, 남, 북, 중천축=지금의 인도)이 여행 목적지였지만 페르시아와 아랍까지 발길을 옮긴 2만㎞ 4년간의 대장정이었다. 그는 고국을 그리워 하였지만, 당나라 장안으로 돌아와 50여 년을 거기서 머물렀고, 출발지인 서라벌로는 돌아오지 않아서 「왕오천축국전」도 고국으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전시물 속에서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 수준을 우리 시대와 비교할 수 있었다. 중앙아시아 문물에서 우리와 비슷한 것들이 몇 가지 있다고 한다. 장신구로 금을 사용한 연대는 4세기 중반에서 6세기까지 라고 하는데 우리와 금관을 사용한 시기가 일치하는 점이라든지, 저고리 선과 색깔과 크기가 우리 한복과 비슷하다든지, 그네들의 황금 허리띠고리가 평양에서 발견된 것과 문양이 똑같다 하는 면이 북방민족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하는 부분들이다.
전시 중심 주제 중 하나인 비단길에 대한 관심을 살펴볼 기회도 되었다. 비단은 중국이 서방에 장사할 독점 품목이었는데, 그 비단을 얻기 위해 후탄왕은 당나라 공주를 아내로 삼으면서 뽕나무 종자나 누에고치를 머릿속에 숨겨서 들여왔고, 낙타로 대상을 하는 소그드인의 삶과 이를 전달하는 기록수단, 생활 토기, 죽은 후 시신을 조장(鳥葬) 후 매장하는 내용을 모자 쓴 해골과 관에 넣는 작은 옷이라든지 나무로 만든 미라 등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기타 옥이나 철기로 만든 장신구나 생활필수품, 격구를 하는 흙인형을 통해 그 시대의 생활사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막고굴에서 나온 「왕오천축국전」은 앞뒤 각 1/3이 없어지고 중간 부분이 남았는데 부처님이 열반하신 구시나국에서부터 중요 일정은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전시장에서 60㎝만 펴도록 하였다니 그것을 감내하고 빌려와야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막고굴이나 주변의 조소상, 벽화 등은 대부분 모형이고 모사여서 막고굴 현장에서 느꼈던 감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왕오천축국전」 실물을 볼 수 있다는 감동이 그를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막고굴 / 중국 둔황 (2010.5.20)
막고굴 / 중국 둔황 (2010.5.20)
왕오천축국전 원본 / 국립중앙박물관 (2011.3.17)
왕오천축국전 영인본
실크로드
막고굴 전면과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17호 동굴 / 중국 둔황 박물관 (201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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