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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곳간/세상 이야기

주력(酒歷)과 주력(酒力)

향곡[鄕谷] 2009. 12. 5. 09:49

 

주력(酒歷)과 주력(酒力)

 

 

 

 

 

 

지금은 미성년자에게 술을 팔 수 없지만 어릴 때에는 술 심부름을 많이 다녔다. 주전자를 들고 동네 가게로 가면 독에 있던 막걸리를 퍼주었는데 한 사람이 마시기엔 만만찮은 양이었다. 집으로 오면서 골목에서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고 아무도 없으면 한 모금씩 몰래 마셨다. 처음엔 핑 돌았지만 그렇게 마시는 술이 알딸딸하고 묘한 기분이었다. 혹시 냄새가 날까 봐 대문에 들어서면서 숨을 죽였다.  酒歷의 시작점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막걸리는 국주(國酒)라면서 막걸리만 드셨다. 옛날부터 사람이 모이는 집은 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했는데 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셔서 그런지 어머니는 집에서 술을 담그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얼마나 막걸리를 좋아하시는지 서울서 있는 결혼식에 참석하실 때는 호텔이나 예식장 으로 우리가 막걸리를 가지고 갔다. 

 

 대학 진학으로 서울 올라오기 전 아버지로부터 술에 대해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가 술을 매일 드시다시피 하여 술에 대해 손사래를 치는 어머니에게 특별히 부탁을 하여 술상을 차리게 하셨다. 술상 앞에 앉아서 술의 유래와 酒道와 덜 취하는 방법 등을 교육받고 아버지께서 주신 몇 잔을 마셨다. 정상적인 술 교육을 받은 자랑할만한 酒歷이었다.

 

그렇지만 酒力은 약하다. 입사 초기에 술 한 병을 마시고는 속이 부대끼고 힘들어 단번에 집에 올 수 없어서 도중에 차에서 내려 쉬다가 오는 일이 몇 번 있었다. 한 번은 술을 마시고 힘들어 택시에서 돈을 주고 내렸는데 택시 기사가 걱정이 된다며 기다리다 다시 그 차를 타고 간 일도 있었다. 지금도 내 酒力은 그리 늘지 않아 몇 잔 들어가면 누가 주었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래도 술자리에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니 친구들이 어김없이 불러준다.

 

지금 막걸리 소비가 크게 늘었지만 나는 진작부터 막걸리를 주로 마셨다. '청주는 성인에 비하고 탁주는 현인과 같아서 성인과 현인을 이미 마셨거늘 하필 신선이 되길 원하느냐' 하였던 이태백의 말대로, 산에 가서 좋은 풍광을 보며 마시는 막걸리는 신선주나 다름없어서 산속에서 술 한잔 하고 나면 달리 신선을 구할 필요가 없다. (2009.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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