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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곳간/세상 이야기

우리 동네 입춘첩(立春帖)

향곡[鄕谷] 2009. 2. 4. 22:45

 

우리 동네 입춘첩(立春帖)

 

 

 

 

 

오늘이 입춘(立春)이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어느 분이 입춘첩을 붙여두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입춘에 크게 길하고 힘이 넘치고 경사로운 일이 있으라는 뜻. 이십수년 살다가 재건축 때문에 몇년 나가 살다가 다시 들어왔는데, 설에는 누가 예쁘장한 설인사를 PC로 뽑아 붙여놨더니, 이번에 입춘첩이라. 그냥 무덤덤 하면 한 없이 건조한 곳이 아파트인데 서로가 인사하고 양보하고 물건을 들고 오는 분 문을 붙잡아 주고 하는 사람들 모습이 좋다. 나도 괜히 한마디씩 거든다. 윗층은 한강이 잘 보이지요 하고 물으면, 내가 사는 곳은 어떠냐고 되묻는다. 겨우 보인다고 그러면, 겨우요 하며 웃는 모습이 좋아 같이 웃는다.

 

겨울을 뚫고 바야흐로 대지에 봄기운이 시작되는 문턱인 입춘이야 말로 겨울을 마무리하고 화사한 봄을 시작하는 절기다. 옛날 대궐에서 설에 신하들이 지어 올린 신년축시 중에서 잘된 것을 대문이나 기둥에 붙인 문구를 입춘첩이라 하였다. 입춘에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어 희망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흥부집 기둥에 입춘방이란 말이 있는데 집이 좁아 격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 되겠으나,  엘리베이터에 붙이니 새로운 맛이 난다. 예로 부터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이라 하여 입춘이나 대보름에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쌓는 복을 지으면 일년 내내 액(厄)을 면한다는 말이 있다. 아름다운 적선을 하였으니 입춘첩을 써서 엘리베이터에 붙인 분이 복을 많이 받도록 빌었다.

 

 

 

 

 

우리 동네 엘리베이터에 붙어있는 입춘첩

 

 

 

 

 숲속바람 2009.02.11 00:35

 

선비님! 반갑습니다. 제가 엘리베이터에 짧은 글을 써서 붙인 사람입니다. 저는 아파트에 살기 시작한 지 벌써 30년 가까이 됩니다만, 옆집에서 누가 죽어도 모르고, 아랫집에서 경사가 있어도 남의 동네일로 생각하는 아파트 문화가 늘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좀 겸연쩍은 일이기는 했습니다만, 용기를 내어 (아무도 안보실 때) 글을 써서 붙였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사람이 우리 집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참. 인연이란 것이 이런 것인가 봅니다.
그런데, 오늘 블로그에 와보니 선비님 사진과 글 솜씨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감히 부족한   제가 이렇게 나서도 되는 것인지? 문득 아득한 생각이 듭니다.    

 

 

정선비 2009.02.11 14:41

이렇게 저의 블로그를 찾아 주시고, 또 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게 글을 써 붙여 모든 사람에게 푸근함을 주시는 일은 아름다운 용기이지요.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분도 여유로움이 배어있었다고 느꼈습니다만 여러모로 좋은 인연입니다.
사진은 초보이고, 글은 그저 저혼자 극적거리며 꾸미는 수준이라 내어 놓기가 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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