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향 글향이 있는 산방

산을 걷고 길을 걸으며 세상을 배웁니다

향 곡 산 방 ( 鄕 谷 山 房 )

글곳간/세상 이야기

한겨울 구천동 탈출기

향곡[鄕谷] 2008. 8. 7. 17:45



한겨울 구천동 탈출기  

 


가족들과 며칠 전 무주 구천동에 갔다. 학교 다닐 때 이곳에서 일어났던 재미있었던 일이 문득 생각났다. 학창시절 전북 장수에서 일주일 동안 봉사활동을 마치고 가까운 무주 구천동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하였다. 봉사지역에서 아쉬운 작별을 하고 시외버스를 두어 번 갈아타고 한겨울 조용하기만한 구천동에 도착하였다.

 

열댓명이 여관방을 잡아 저녁을 지어 먹고, 주머니 사정을 확인하였더니 여관비 치루고 겨우 귀경할 정도였다. 방은 불기운 이라곤 없고 얼마나 찬지 가위바위보를 하여 진 사람 둘이서 불을 지피기로 하였다. 내가 뽑혔다. 나무를 때는 여관방이었는데 방도 추웠지만 밖에도 바람이 불고 날씨가 얼마나 찬지 손이 곱아 성냥을 켜지도 못할 정도였다. 성냥도 시원챦아 불 하나 붙이는 데 한 통을 다 소비하였다. 그래도 그럭저럭 남은 재료로 저녁도 해먹고 불도 지피고 잠을 잤다.

 

문제는 다음날 아침에 발생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많이 와서 온 세상을 가두어 놓았다. 비상사태 였다. 눈 때문에 버스는 구천동으로 아예 들어오질 못하였다. 그러니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없는 살림에 웬 날벼락인지. 적어도 하루를 더 묵어야 하는데 묵을 돈도 다 떨어졌는데 말이다.

 

그 때가 크리스마스 무렵 이었다. 우리는 모여서 작전을 짰다. 돈이 없으니 아침 겸 점심은 흩어져서 교회와 절에 가서 얻어먹기로 하였다. 교회는 가까이 있지만 내가 속한 조는 절에 가기로 했는데 두 시간 가까이 올라가야 했다. 주변 경치는 순백색으로 아름다웠지만 목적이 얻어먹으러 가는 거라 그리 여유가 있지 못했다. 길은 평탄하였다. 절에 도착하니 이미 밥 때는 한참 지났다. 사정을 하여 누룽지와 이것 저것 얻어 먹었지만 배가 고팠다.  점심이 지나고 여관에 다시 모였는데 언제 버스가 다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답답한 노릇 이었다. 여관 주인에게 사정을 하여 쌀도 얻고 여관비는 서울 올라가면 부쳐 주겠다고 하였다.

 

저녁이 되자 앞길이 막막했는지 한 여학생이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였다. 여학생을 달래고 기분 을 풀기로 하고 연극팀을 만들었다.  연극영화과 학생이 주동이 되어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카시미론 이불을 이용하여 막을 치고 랜턴으로 조명을 하였다. 식품공학과 학생은 소콜계주를 만들었다. 소주 콜라 계란노른자에 설탕을 섞어 흔들면 양주맛이 난다고 너스레를 떨며 한잔씩 돌렸다. 정말 맛있었다. 얘기가 재미있어서 여학생 얼굴이 풀어졌다. 그 날 저녁 아궁이 당번 은 바뀌었다. 우리는 아궁이 당번을 화공도사라 불렀다.

 

전날 부터 햇볕이 들어 녹기 시작하더니 다음 날도 맑았다.드디어 시외버스가 들어왔다.  모두 신이 났다. 시외버스에 올라 타서도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였다.  눈빛 화려한 무주 구천동을 빠져나오며 모두가 멀어져 가는 산길을 뒤돌아 보았다. 한겨울 구천동 탈출기는 그렇게 생겼고, 생각지도 않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글곳간 > 세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구마를 캐며  (0) 2008.09.16
산소 가는 길 2  (0) 2008.09.11
41년만에 선 교정  (0) 2008.06.21
아버지의 기다림  (0) 2008.04.26
손 없는 날  (0) 2008.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