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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에서 낙산성곽을 넘어 흥인지문까지

향곡[鄕谷] 2019. 12. 14. 12:13

 

 

혜화동에서 낙산성곽을 넘어 흥인지문까지

 

혜화역-성균관-혜화문-낙산성곽-흥인지문 (2019.12.10)

 

 

 

성균관 명륜당

 

 

 

혜화역은 대학로의 중심이다. 미세먼지가 심하다는데 젊은이들이 많다. 하는 일이 많은 것이다. 성균관대학교로 갔다. 성균관은 조선 최고 교육기관으로 고려 때 국학을 성균관으로 개칭한 이름을 국자감으로 불렀다가 다시 회복한 이름이다. 한양 천도 후 3년 뒤 이곳에 터를 잡았다. 문묘인 대성전 일원은 성균관의 향사공간으로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현철들을 봉안하고 있다. 교육공간은 명륜당으로 학관과 유생들의 배움터다. 1519년 심어 올해 500년 된 은행나무는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에서 공부한 유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았을 것이다. 

 

성균관 정문에는 영조의 친필을 새긴 탕평비가 있다. 예기에 나오는 구절로 우리말로 옮겨 적으면, "두루 하되 편 가르지 않음은 군자의 공명정대한 마음이요, 편 가르되 두루 하지 못함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유학의 본산인 성균관 앞에 영조는 친필로 그 뜻을 알렸지만 영조의 뜻과는 달리 그 이후의 역사는 이런 바람과 거리가 멀다. 영조의 이 바람은 지금도 유효한 것이며, 아직도 요원한 바람이 되고 있다.

 

성균관을 나와 혜화문으로 향했다. 혜화문은 이곳 도성길로 낙산으로 가기 위함이다. 태조는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한 뒤 가장 먼저 종묘, 사직, 궁궐을 건설하고 2년 뒤 도성(都城)을 축조했다. 19㎞의 도성을 11만의 인원을 동원하여 1~2월에 49일 만에 건설하고, 성이 비로 허물어지니 그해 8~9월에 다시 세우니, 백성의 고초는 말도 못 했다. 당시 한양 인구가 5만이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태조 때는 6㎞만 석성이고 나머지가 토성이었다. 세종 때 32만 명을 동원하여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는 대공사를 벌이고, 280여 년 뒤 숙종 때 6년간 대대적 수축을 하였다.

 

동소문으로 쓰던 혜화문의 혜화(惠化)는 은혜를 베풀어 교화한다는 뜻이다. 여진족이 출입하는 문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다른 성문의 문루 바닥은 용을 그렸는데 이곳은 봉황이다. 부근에 새가 많아서 새 중의 왕인 봉황을 그렸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전차를 놓는다고 이 문을 뜯었고, 다시 언덕 위에 새로 세운 것은 25년 정도 되었다. 동소문로 길을 건너 낙산 성곽길로 들어섰다. 낙산(駱山)은 낙타등 같이 생겼다고 지은 이름처럼 부드럽다. 그만큼 산이 허하기도 하다.

 

성곽 돌은 시대별로 다르다. 어떤 것은 바르고,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배가 나오고 말이다. 성곽 돌에는 각자(刻字)를 하여 축성의 내용을 남겼다. 년대, 일자, 지역, 축성 구간, 석수 이름, 감독자 계급과 이름이 낙산 축성구간에 있다. 백성은 고초를 겪었어도 확실한 실명기록이다. 몰아쳐하여도 허술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대문 중 유일하게 평지에 세우고, 옹성으로 호위하고 있는 흥인지문까지 왔다. 옹성을 두르고, 가산(假山)을 개천 옆에 만들고, 갈지(之) 자를 현판에 쓰고 여러 비보 장치를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곳 문 양 날개를 헐었다. 짧은 구간이지만 한 없이 긴 얘기가 숨어있는 곳이 오늘 걸은 길이다.

 

 

        

성균관 명륜당과 은행나무

 

 

 

 

 

 

 

 

향사의 중심건물 대성전. 대성전은 한석봉의 글씨다.

 

 

 

 

혜화문

 

 

 

 

낙산성곽

 

 

 

 

태조(위) 때와 세종(아래) 때 쌓은 성돌

 

 

 

 

숙종 때 쌓은 성돌. 희미하게 영동(永同)이란 글씨가 보인다. 충북 영동 주민이 쌓은 구간이다

 

 

 

 

낙산공원에 있는 이화동 벽화마을 조형물

 

 

 

 

낙산 동대문 구간에 있는 각자. 강희(康熙) 45년 4월 개축이라 썼다.

강희는 청나라 성조(聖祖)의 연호로 강희 45년은 숙종 32년(1706년)이다

 

 

 

 

낙산 동대문 구간에 있는 각자. 석수(石手)와 감독관 등 축성자 이름이 나온다.

왼쪽에 이패 변수(二牌邊首)와 일패 변수(一牌邊首) 이름이 보인다. 일패 변수는 일패에 속한 석수의 우두머리이다.

 

 

 

 

흥인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