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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과 숲 16. 고양 서삼릉 2. 소경원(昭慶園.소현세자), 예릉(睿陵.철종)

향곡[鄕谷] 2021. 12. 17. 11:26

왕릉과 숲 16

 

고양 서삼릉 2. 소경원(昭慶園. 소현세자), 예릉(睿陵. 철종)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 40-3

 

 

소경원(昭慶園) : 소현(昭顯) 세자 (조선 16대 인조의 첫째 아들. 1612-1645.33세)의 원

예릉(睿陵) : 철종(조선 25대 哲宗. 1831-1863(32세), 재위 14년 6개월(1849.6-1863.12))과 철인(哲仁) 왕후(1837-1878.41세)의 능(쌍릉)

왕자, 공주, 후궁의 원(園) 3(소경원, 의령원, 효창원), 묘(墓) 46, 태실(胎室) 54기

 

 

 

소현세자는 제16대 인조의 첫째 아들이다. 세자의 지위에서 죽어 그의 무덤은 원(園)이다. 소현세자는 앞날을 내다본 선각자였으나 권력 암투에 희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에서 치욕의 항복을 한 인조는 아들 셋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막내는 일찍 돌아왔지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8년 만인 인조 22년(1644년)에 돌아왔다. 소현세자가 32세였다. 소현세자는 청의 문물을 배워 나라를 일으키려는 실리의 생각이 있었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자신의 반청에 반기를 든 정적으로 생각하였고, 자신의 자리를 뺐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점을 이용한 정치세력이 모함을 하며 귀국 두 달이 되어 발병 3일 만에 죽었다. 8년간 이국에서 굳굳하던 세자가 죽었다. 인조실록에서는 소현세자가 죽은 후 온몸이 검은빛이었고, 얼굴에 각 구멍에서는 선혈이 나와 약물에 중독된 것 같다고 하였다. 인조가 독살에 관련되었다고 보는 것은 후사 처리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제주도에 귀양 보내 죽게 했고, 세자빈 강 씨는 소현세자를 독살한 저주의 배후라며 사약을 내려 죽게 했다. 세자빈의 오빠는 장살로, 세자빈의 어머니까지 처형하였다. 청나라에 대한 분노의 표적으로 세자의 남은 가족이 대상이 되었다. 원손으로 대를 잇는 것이 아니라 봉림대군을 세자(후에 효종)로 책봉했다. 처음에는 소현묘라 하였으나 고종 때 소경원으로 격상하였다. 소현세자가 서양문물에 눈을 뜬 것이 조선이 개항한 1876년보다 232년이나 빠르다. 선각자 소현세자를 잃어버린 후유증이 근대사의 아픔으로 돌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소현세자가 묻힌 소경원은 개방 금지구역이라 들어갈 수가 없다.

 

예릉은 철종 내외가 묻힌 곳이다. 24대 헌종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를 계승할 적자가 없었다. 부랴부랴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아우인 은원군의 손자인 원범을 낙점하여 임금으로 삼기로 했다. 할아버지 은원군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형당하고, 아버지 전계군은 세 아들을 두었다. 맏이가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하자 전계군은 두 아들을 데리고 강화도에 숨어들었다. 글을 배우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 생각하고, 아들들을 농사꾼으로 만들었다. 원범의 아버지 전계군과 어머니도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잃고 작은형마저 죽어 원범은 고아가 되었다. 강화도령으로 알려진 원범이 왕이 되었으니 철종이다. 이름만 왕이지 수렴청정을 받고 장동 김 씨의 손아귀에 있었다. 철종은 왕 노릇을 포기하고 여색에 빠져 요통에 걸려 32세에 죽었다. 통상 오후 5시 무렵에 왕의 공식 일과가 끝나면 당직 승정원 승지를 제외하고 조정 대신들은 퇴근한다. 이때부터 왕은 자신의 생활을 할 수 있고, 사관의 눈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실록도 그 시간 이후는 기록하지 않는다. 철종은 그 시간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예릉은 조선왕릉 형식으로 조성한 마지막 왕릉이다. 그다음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라 황제의 예에 따라 무덤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서삼릉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조선 중종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가 묻힌 희릉이 있고, 바로 옆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철종 내외가 묻힌 예릉이다. 오리나무·신나무·때죽나무를 지나면 초입에 골담초(骨擔草)가 있다. '뼈를 책임지는 풀'이란 뜻인데, 이름에 풀(草)이 들어 있듯 풀처럼 작은키나무다. 요통으로 고생한 철종에게 맞는 나무이다. 골담초 뿌리를 말린 것을 골담근(骨擔根)이라 하는데 무릎이 쑤시거나 다리가 붓거나 신경통에 썼다. 작은키나무인 말발도리, 병꽃나무가 마른 열매를 매달고 있다. 말발도리는 열매가 말발굽에 씌우는 편자 모양이고 도리는 동그랗고 작다는 뜻이니, 열매가 편자 모양처럼 생기고 작다는 뜻이다. 종소명은 작은 꽃에 특징을 두었는데, 우리 이름은 열매에 방점을 찍었다. 소나무와 참나무 숲을 지나다 보면 백당나무가 새빨간 열매를 매달고 있다. 하얀(白) 꽃이 단(段)을 이루듯 피어 백단나무라 하다가 백당나무가 되었다. 하얀 꽃으로 귀염을 받았는데, 이젠 열매로 귀염을 차지하고 있다. 아름다운 도래솔을 거느린 예릉을 나오면 재실 쪽이다. 조선왕조의 상징인데도 관리를 받지 못한 자두나무가 있고, 미선나무·작살나무·팥배나무를 지나면 의령원과 효창원이다. 두릅과 음나무가 한 두 그루 보일 뿐 다른 식생은 거의 없다. 주변 목장에 운반용 트럭만 분주하다.   

 

서삼릉은 왕릉 셋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좀 복잡하다. 조선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로, 능(陵)이 42기, 원(園)이 13기, 묘(墓)가 64기이다. 그 중 서삼릉에는 능 3, 원 3, 묘 46기가 있고, 태실(胎室) 54기가 모여 있다. 좁은 터에서 비좁게 자리 잡고 있다. 왕릉 안에는 후궁이나 왕자, 공주의 묘를 원래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멸망하자 일본 궁내성 소속으로 망조 왕실을 관리하기 위한 이왕직(李王職)을 설치하여 각지에 있는 왕실 무덤을 이곳에 천묘하였다. 왕실의 공동묘지를 만든 것이다. 광복 이후에도 천묘가 계속되었다. 더 많은 왕자와 공주의 묘도 있었겠지만 이들은 사라지거나 흩어졌다. 이곳에는 태실도 있다. 왕실에서는 왕세자, 왕자, 세손, 공주, 옹주가 태어나면 태(胎)를 석실(石室)에 담아 전국 길지에 두었다. 그곳을 태봉(胎峰)이라 했는데, 태실도 모두 서삼릉 경내로 옮겼다. 능역을 공동묘역으로 만들어 왕릉의 존엄과 품격을 해치고 훼손시키려는 일제의 책략이었다. 그런 데다가 1960년대 말 서삼릉 영역도 다시 구분하여 낙농단지를 조성하고 골프장을 만들고, 대학과 군부대에 넘겨 서로 통행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 그래서 개방 금지구역이 생겼다. 하루빨리 이곳 터를 원래대로 돌려서 많은 사람들이 세계문화유산을 찾을 수 있도록 할 날을 기다린다.

 

 

서삼릉에서 본 식물 … 오리나무가 많고 크기도 하다

오리나무, 백송, 전나무, 때죽나무, 신나무, 국수나무, 물푸레나무, 느티나무, 참빗살나무, 골담초, 말발도리, 병꽃나무, 미선나무, 백당나무, 자두나무, 팥배나무, 음나무, 두릅나무, 단풍나무, 참나뭇과 나무, 소나무, 산뽕나무

 

 

 

오리나무

 

 

 

골담초

 

 

 

말발도리

 

 

 

백당나무

 

 

 

예릉(철종능)

 

 

 

예릉

 

 

 

정자각

 

 

 

참도 / 정자각에서

 

 

 

예릉

 

 

 

예릉

 

 

 

예릉 문무인석

 

 

 

의령원(사도세자 맏아들 의소세손의 원)과 효창원(정조 맏아들 문효세자의 원)

 

 

 

의령원과 효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