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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과 숲 17. 파주 삼릉 - 공릉(恭陵.예종비), 순릉(順陵.성종비), 영릉(永陵.추존 진종)

향곡[鄕谷] 2021. 12. 21. 22:25

 

 

왕릉과 숲 17

 

파주 삼릉 - 공릉(恭陵. 예종비), 순릉(順陵. 성종비), 영릉(永陵. 추존 진종)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 4-1

 

 

공릉(恭陵) : 조선 8대 예종비 장순(章順) 왕후 한(韓)씨(1445-1461.17세) 능(단릉)

순릉(順陵) : 조선 9대 성종비 공혜(恭惠)왕후 한(韓)씨(1456-1474,19세) 능(단릉)

영릉(永陵) : 추존 진종(眞宗. 조선 21대 영조 맏아들. 효장(孝章) 세자. 1719-1728(9세))과 추존 효순(孝順) 왕후 조(趙)씨(1715-1751.36세)) 능(쌍릉)

 

 

 

파주 삼릉은 소나무를 심고 개천과 주변을 정비를 하고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후 부족한 것을 채워 넣는지 분주한 모습들이다. 기존에 자라는 전나무는 키가 제법 크다. 전나무는 숲을 웅장하게 한다. 왕릉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주요 권장 수종이다. 재실에는 왕릉에서는 보기 드문 큰 아그배나무가 있다. 아기배를 닮았다고 아그배나무라 하는데,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배보다는 사과를 더 닮았다. 재실 부근을 지나면 참나무과 종류의 나무가 많고 신나무, 때죽나무가 듬성듬성 보인다. 서어나무는 반질반질한 겨울눈이 풍성하다.

 

공릉과 순릉에 누운 예종비 장순왕후 한씨와 성종비 공혜왕후 한 씨는 자매지간으로 한명회의 세 번째와 네 번째 딸이다. 역사에서 한명회는 절세의 처세 가요, 책략가요 모사꾼으로 나온다. 딸들을 그렇게 시집보내 세조와 겹사돈을 맺었다. 권력을 잡고자 하는 수양대군에게 수양의 좌장 권람이 친구인 한명회를 책사로 불러온 후 한명회의 시대가 열렸다. 한명회는 왜소하고 볼품없는 칠삭둥이로 태어나 부모를 일찍 여의어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그는 과거에 낙방만 하였는데, 공신의 자손이라 과거 없이 채용하는 문음제도에 의해 늦은 나이에 경덕궁 직으로 출발하였다. 결국에는 좌부승지, 도승지, 이조판서,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집현전 학사 신숙주와 인척관계를 맺고, 친구 권람과 사돈관계를 맺고 승승장구하며 요직을 차지하고 1등 공신이 되어 토지와 노비를 받아 압구정의 부를 축적하였다. 그는 지략도 있었고, 딸의 음덕이 있었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가 죽고 둘째 아들(예종)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한명회는 그의 셋째 딸을 세자빈에 앉혔다. 세자빈은 아름답고 정숙하였다. 세자빈으로 책봉된 다음 해에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열일곱에 세상을 떴다. 어렵게 낳은 그 자식은 세 살에 죽었다. 세조는 자신의 맏아들(의경세자. 추존 덕종)도 일찍 잃었지만, 며느리도 잃고, 둘째 아들(예종)도 손자도 일찍 보냈다. 세조는 며느리에게 장순이란 시호를 내리고, 성종은 장순왕후로 추존하였다. 터는 좁아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향로는 지형에 따라 한번 꺾이고, 향로에 깔린 돌은 거칠다. 공릉은 처음 세자빈 묘로 조성되었기에 봉분에 병풍석, 난간석, 망주석은 없고, 무인석도 없다. 

 

한명회는 넷째딸이 11살 때 한 살 적은 의경세자(덕종)의 둘째 아들 자산군과 혼례를 맺게 했다. 병약한 예종이 일찍 세상을 뜨자, 왕위 결정권을 가진 세조비 정희왕후 윤 씨가 자산군을 왕(성종)으로 지명하고 딸은 왕비(공혜왕후)가 되었다. 공혜왕후는 예의 바르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왕비는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떴다. 부인 수가 열둘 인 성종인데, 왕비가 후사가 없으니 후궁들에게 괄시를 받았을 것이다. 왕비가 죽고 숙의 윤 씨가 왕비로 되고 연산을 낳았다. 나라의 기운이 그렇게 비틀어졌다. 공혜왕후는 왕후여서 세자빈으로 죽은 언니에 비해 능에 세운 석물은 많다. 능호는 각기 공(恭)이요 순(順)이다. 공손하고 순하게도 딸이 희생하고 아비는 권력을 얻었다.   

 

영릉(永陵)에 묻힌 추존 진종(眞宗. 효장세자)은 영조가 즉위하기 전 연잉군 시절, 스물다섯 살에 낳은 맏아들이다. 6살에 왕세자가 되었으나 9살에 요절했다. 이어서 이복동생 사도세자가 새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정치적 모함으로 뒤주 속에서 질식사하였다. 그러자 세손(정조)을 죽은 효장세자에 입적시켜 왕통을 잇게 했다. 당시에는 사도세자가 죄인이니 죄인의 아들을 적통을 잇게 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그랬다는 것이다. 옆에 묻힌 효순왕후는 12세 세자빈으로 8살 효장세자와 가례를 올렸으나 효장세자가 일찍 죽자 후손이 없이 36살까지 살았고, 나중에 효순이란 시호를 받았다. 영릉은 세자와 세자빈의 예에 따라 조성하여 간소하다. 이곳 삼릉은 추증된 묘호들이라 다른 왕릉에 비해 간소하다. 걸어 나오는 숲길은 아늑하다.

 

 

※ 대중교통 : 3호선 구파발역 2번출구에서 17.30.31 버스 이용. 파주삼릉 입구 하차 → 파주삼릉 도보 10분   

 

 

 

 

 

아그배나무가 있는 재실

 

 

 

재실 부근 전나무

 

 

 

공릉

 

 

 

공릉

 

 

 

공릉 문인석

 

 

 

순릉

 

 

 

순릉

 

 

 

순릉 문무인석

 

 

 

순릉 정자각에서

 

 

 

순릉 비각

 

 

 

영릉

 

 

 

영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