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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과 숲 19. 파주 장릉(長陵.인조)

향곡[鄕谷] 2021. 12. 23. 17:35

왕릉과 숲 19

 

파주 장릉(長陵. 인조)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 25-1

 

 

장릉(長陵) : 조선 16대 인조(仁祖. 능양군. 추종 원종의 맏아들. 1596-1649(54세). 재위 26년 2개월(1623.3-1649.5))와 인열(仁烈) 왕후 (1594-1635.41세)의 능(합장릉)

 

 

 

인천 계양산에서 나온 산줄기에 추종 원종이 묻힌 김포 장릉이 있고, 그 일직선 뒤 파주 장릉에 아들인 인조와 원비 인열왕후 한 씨가 묻혀 있다. 인열왕후는 넷째 아들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미리 세상을 떠났다. 인조는 왕후를 파주 운천리에 장사 지내고, 그 오른쪽에 자신이 묻힐 수릉(壽陵. 왕이 죽기 전에 미리 마련한 능)을 마련하였다가 자신도 그곳에 묻혔다. 왕후 무덤을 쓸 때 백성의 무덤 750여 기를 강제 이장하여 임진왜란 후 어려운 시기에 왕에 대한 평판도 좋지 않아 백성들 원성이 컸다. 그렇게 쓴 무덤에 뱀과 전갈이 집을 지어 불길하다고 하여 영조 7년(1731년)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 왕위에 올라서도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몸을 피했고 백성들 고통도 막심했는데, 죽어서 이장에 백성의 고통을 더하였다.  

 

궁궐에 벼락이 떨어지면 왕실에 무슨 징조가 있다고 했는데,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인조 8년(1630년) 종묘 앞 버드나무에 벼락이 떨어진 기록이 있다. 그래서 위안제를 올렸다는데, 스스로 잘못을 찾아서 반성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때 무슨 조짐을 알려준 것일까?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한해 전 청 태종이 홍시 3만 개를 요구하여 인조가 보내라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당시 만주에서는 감나무가 자라기 어려웠으니 감이 귀했을 것이다. 실속도 차리면서 조선을 얕잡아 보고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일 것이다.

 

선조 등극 후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인들은 명나라 황제에 불충한 광해군을 축출하는 것으로 반정의 명분을 만들었다. 당론에 맞지 않으면 왕을 갈아치우는 것은 왕도정치의 파탄이었다. 숭명반청(崇明反淸)의 명분 때문에 실리외교로 청나라에 현실적으로 접근한 광해군을 몰아내어 끝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불러왔고, 삼전도 굴욕을 가져왔다. 반정은 결국 전란을 불러온 계기가 되었다. 정묘호란에서 약조를 맺어 청군은 철수했지만, 9년 뒤 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까지 전혀 대비가 없었다. 병자호란 후에도 척화에 동조하여 싸우자니 군사가 없었고, 강화를 따르자니 반정 명분이 없어지는 모순에 빠졌다.

 

병자호란은 주화파 뜻에 따라 45일 만에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하며 굴욕의 항복을 하였다. 인조는 군신의 약조로 청나라를 섬겨야 했다. 호란이 아니라 일방적인 패전이었다. 그러자 인조는 청나라를 인정하려는 소현세자를 제거하여 분노를 표시하였다. 소현세자와 세자빈과 아들들, 그리고 처가 식구까지 모두 죽이는 참살을 했다. 승려들은 임진왜란에서 왜군과 싸우고, 남한산성 성곽 수축에 많은 인원이 참여하였는데, 인조는 즉위하자 승려들 궁성 출입도 금했다. 그의 묘호는 인조(仁祖)다. 할아버지로서 손자를 죽인 왕이 인(仁)이라니 받은 묘호가 부끄럽다. 묘호는 국왕이 세상을 떠난 후 왕위를 계승한 국왕과 대신들이 논의를 거쳐 대신들이 삼망(三望)을 올리면 왕이 그중 하나를 낙점하는 방식으로 결정한다. 다음 왕이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효종)이니 어찌할 것인가?

 

파주 장릉은 탄현면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으로 좁은 도로가 지나고 논이 바로 옆에 있다. 큰기러기들이 모여 모여 논에서 낟알을 찾고 있다. 큰 기러기는 우리나라에 오는 기러기 중에 쇠기러기와 더불어 가장 많다. 능역 입구에는 습지에서 잘 자라는 오리나무를 많이 심었다. 재실 부근에 느티나무와 참나무 종류 나무가 우람하여 왕릉의 숲을 풍성하게 한다. 느티나무는 가지가 넓게 퍼져 재실 앞에 넓은 쉼터를 마련하였다. 능역 부근이 넓어 홍살문에서 정자각 가는 참도는 넓고 원형이 그대로 잘 남아 있다. 참도는 향로와 어로 외에 신하들이 다니던 길인 변로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왕릉을 이장하느라 과거에 석물과 새로 조성한 석물을 비교할 수 있는데, 멀어서 볼 수가 없다. 능은 넓고 아늑하다. 살았을 때 사람이 그러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능 주변에 소나무는 잘 가꾸었다. 능 주변 산책로는 막아서 들어가지 못하였다. 능도 한때 비공개였던 모양이다. 이곳은 굴욕의 삼전도와 거리가 멀다. 굴욕에 부끄러워 삼전도에서 멀리 떨어진 것일까? 반정은 짧고 굴욕은 길다.

 

 

※ 대중교통 : 지하철 경의중앙선 금촌역 1번 출구 900번. 마을버스 33번. 36번 (30분), 지하철 2호선  6호선 합정역 1번 출구에서 2200번 버스 (1시간)

 

 

 

 

 

큰기러기

 

 

 

큰기러기

 

 

 

오리나무

 

 

 

느티나무

 

 

 

파주 장릉이 보이는 금천교 부근

 

 

 

파주 장릉

 

 

 

장릉 무인석

 

 

 

파주 장릉

 

 

 

왕릉 길

 

 

 

파주 장릉

 

 

 

오리나무숲

 

 

 

참나무 숲

 

 

 

인조가 항복하러 나온 남한산성 서문(우익문)

 

 

 

삼전도비 / 서울 송파구 (2012.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