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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과 숲 20. 고양 서오릉 1. 경릉(敬陵.추존 덕종)과 창릉(昌陵.예종)

향곡[鄕谷] 2021. 12. 29. 19:28

 

왕릉과 숲 20

 

고양 서오릉 1. 경릉(敬陵. 추존 덕종)과 창릉(昌陵. 예종)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 30-6

 

 

경릉(敬陵) : 추존왕 덕종(德宗. 7대 세조 첫째 아들. 의경(懿敬) 세자. 9대 성종의 아버지. 1438-1457(20세))과 소혜(昭惠) 왕후 한(韓)씨(인수대비(仁粹大妃. 1437-1504.67세)의 능(동원이강릉)

창릉(昌陵) : 조선 8대 예종(睿宗. 7대 세조 둘째 아들. 1450.1-1469.11(20세). 재위 1년 2개월(1468.9-1469.11))과 계비 안순(安順) 왕후 한(韓)씨(?-1498년)의 능(동원이강릉)

 

 

 

 

서오릉(西五陵)은 '서쪽에 있는 5기의 능'이란 뜻이다. 서오릉은 세조 혈통의 선산 왕릉으로 동구릉만큼이나 넓다. 추존왕 덕종의 경릉을 이곳에 처음 조성하였다. 덕종은 세조의 맏아들로 세자의 신분으로 스물에 세상을 떠났다. 세조는 세상을 떠난 아들에게 의경세자란 시호를 내렸다. 아비 세조의 업보인지 세조는 후대 복이 없었다. 의경세자는 억울하게 죽은 단종의 어머니 혼령이 원귀로 맴돌아 악몽에 시달리다가 가위눌려 죽은 것으로 전한다. 이곳에 터를 잡아 대군 묘의 예에 따라 장례를 지냈다. 나중에 아들 자을산군이 왕위(성종)에 올라 덕종으로 추존하였다. 소혜왕후 한 씨는 당시 도원군이던 덕종과 혼인하여 월산대군과 자을산군을 낳았다. 자을산군은 의경세자가 죽기 한 달 전 낳은 아들이다.

 

한 씨(소혜왕후)는 왕세자비로 살다가 의경세자가 죽고 사가로 돌아갔다. 세조가 죽고 시동생인 예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1년 2개월 만에 죽었다. 왕위 결정자인 세조비 정희왕후 윤 씨는 다음 왕을 1순위 예종 장남 제안대군, 2순위 소혜왕후 장남 월산대군을 제치고, 3순위인 역시 소혜왕후 차남 자을산군(성종)으로 정하였다. 세조비 정희왕후와 한명회와 신숙주의 정치적 결탁이란 설이 유력하다. 아들(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사가에 있던 소혜왕후는 궁궐로 들어와 인수대비가 되었다. 인수대비는 부녀자의 예의범절에 대한 '내훈(內訓)"을 썼다. 그런 인수대비는 손자 연산군의 무례와 부덕을 꾸짖다가 연산군이 머리로 받아 죽었다. 조선왕릉은 정자각에서 볼 때 왼쪽에 왕릉, 오른쪽에 왕후 능을 배치하는데, 경릉은 이와 반대다. 그렇게 배치한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석물도 많다. 죽었을 때 신분이 덕종은 왕세자이고, 소혜왕후는 왕대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덕종의 능은 왕세자 묘로 조성하였고, 소혜왕후 능은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창릉은 예종의 능이다. 세조의 맏이 의경세자에 이어 둘째 예종도 일찍 죽었다. 예종은 어린 나이 11살에 첫아들을 봤으나, 예종비 장순왕후는 16살에 요절하고, 예종의 첫아들 인성대군은 세 살에 죽었다. 하늘이 세조의 후손을 막는 것인지 그러하였다. 예종은 정난공신들의 전횡에 분개하다가 즉위 직후 세조가 허용한 분경(인사권자를 찾아다니며 하는 엽관 운동)과 대납(백성들의 세금을 선납하고 나중에 더 징수하여 착취)을 금지하다가 재위 1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잘못된 쿠데타에서 출발한 체제가 후계자를 겨눈 것으로 보고 있다. 세조 때 시작한 경국대전을 예종 때 완성하였지만 반포는 다음 왕 성종으로 넘어갔다. 안순왕후 한 씨는 한명회의 딸인 예종의 비(장순왕후)가 병사하자 세자빈으로 들어와 왕비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예종이 죽어 왕대비가 되었다. 안순왕후의 아들 제안대군은 왕위 계승 1순위였으나 왕통을 잇지 못하였다.

 

예종 때나 성종 때는 제주도에 비자나무 벌채를 금지하자는 상소가 있었다. 관리들이 부패하고 세제가 문란하여 제주에서 비자나무와 감귤 수탈이 심하였다. 참다못한 백성들이 비자나무를 다 자르고 오늘날에는 제주 구좌읍 광대리 비자나무숲만 남게 되었다. 공물을 올리라고만 하였지 백성의 고통은 마음에도 없었던 것이다. 서오릉에서 뒤로 올려다보면 봉산-앵봉산 능선이 보인다. 서울둘레길이 지나가는 능선이다. 창릉 옆으로는 경릉까지 돌아오는 산책로가 있다. 서어나무숲 2㎞와 소나무 숲 1㎞를 돌아 나오면 경릉이다. 여러 왕릉 산책로 중에서도 긴 산책길에 속한다. 나무는 서어나무, 소나무, 참나무, 물푸레나무 등이 주종을 이룬다. 왕릉에 와서 물푸레나무를 보면 그 당시 백성들의 고난한 삶이 생각난다. 물푸레나무는 농기구나 설피를 만들어 썼는데, 관가에서는 죄인을 심문할 때 몽둥이를 물푸레나무로 만들었다. 예종 때 형조판서 강희맹은 지금 쓰는 몽둥이는 작아 죄인들이 자백하지 않으니 물푸레나무를 쓰자고 상소를 올렸다. 최초의 원예서 양화소록(養花小錄)을 쓴 강희안의 동생이 강희맹이다. 18대 현종 때 와서 물푸레나무는 너무 딱딱하니 버드나무로 몽둥이를 바꾸자 했는데 아프기는 마찬가지고 관리들은 그 말도 잘 안 들었다. 조선시대에는 물푸레나무 껍질을 우려낸 물로 눈을 씻어 안질을 치료하는 고마운 나무이기도 했다.

 

예종은 살아생전 자신의 묘호를 정했다. 묘호를 정할 때 대신들이 삼망(三望)을 올리면 뒤를 잇는 왕이 결정을 하는데, 국왕 자신이 생전에 좋아하던 글자로 정한 것이다. 예종(睿宗)과 명종(明宗), 영조(英祖) 세 국왕이 그에 해당한다. 예종은 일찍이 예(睿. 지혜스러울 예)를 택하여 예종이란 두 글자를 책 등에다 쓰고 '죽어서 이 시호를 쓰면 만족하겠다'라고 했다. 이들이 생전에 원했던 시호는 죽어서까지 좋은 이름을 얻고 싶어 한 욕망을 읽게 한다. 예종은 일찍 세상을 떠나 이름대로 지혜로움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중국에서 시작한 종법제는 묘호를 정할 때 공(功)이 있는 자는 조(祖), 덕이 있는 자는 종(宗)으로 한다고 했다. 고려와 조선도 이를 따랐고, 실제 태조만 조(祖)이고 그 뒤로는 종(宗)으로 하는 것으로 하고 실제 그렇게 했다. 그러나 예종은 세조에 대해 당초 대신들이 정한 종(宗)을 넣은 삼망의 묘호를 모두 거부하고, 사직을 다시 일으켰다며 조(祖)를 고집하고 공적에 맞게 세(世)를 넣어야 한다며 세조(世祖)라 하였다. 같은 반정의 왕인 중종은 평가가 달라 그대로 종(宗)이고, 영종과 정종은 백 년이 지나서 영조와 정조로 바꾸었고, 선종은 선조로, 태조의 왕위 계승자는 태종으로 하게 되어 있는데 이방원이 그 묘호를 가졌고, 2대 왕 방과는 정통 군주 역할을 못하였다고 하여 공정왕으로 있다가 3백 년 뒤인 숙종 때에 와서야 정종이라 묘호를 얻었다. 조(祖)와 종(宗)은 헝클어졌고, 종(宗)을 조(祖)로 바꾸어야 권위가 서는 것으로 보았다. 이름으로 공덕을 평가하지만 이름이 가진 뜻 자체가 평가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왕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지만, 역사는 그 이름이 행한 행위에 대해 심판한다.

 

 

 

 

 

 

오리나무

 

 

경릉 (추존 덕존과 소혜왕후의 능)

 

 

 

경릉 (추존 덕종)

 

 

 

경릉 덕종릉 문인석과 석양

 

 

 

경릉 소혜왕후능

 

 

 

향로 계단

 

 

 

창릉 (조선 8대 예종과 두번째 왕비 안순왕후 능)

 

 

 

창릉 예종릉

 

 

 

창릉 안순왕후능

 

 

 

창릉 정자각

 

 

 

서오릉 창릉 부근

 

 

 

서오릉 숲길

 

 

 

서오릉 서어나무숲

 

 

 

서오릉 소나무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