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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과 숲 21. 고양 서오릉 2. 명릉(明陵.숙종),익릉(翼陵.숙종원비 인경왕후),대빈묘(大嬪墓.장희빈)

향곡[鄕谷] 2021. 12. 30. 20:34

 

 

왕릉과 숲 21

 

고양 서오릉 2. 명릉 (明陵. 숙종), 익릉(翼陵. 숙종 원비 인경왕후), 대빈묘(大嬪墓. 장희빈)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 30-1

 

 

명릉(明陵) : 조선 19대 숙종(肅宗. 18대 현종의 첫째 아들. 1661.8-1720.6(59세). 재위 45년 10개월(1674.8-1720.6))과 제1계비 인현(仁顯) 왕후 민(閔)씨(1667-1701.34세)와 제2계비 인원(仁元) 왕후 김(金)씨(1687-1757.70세)의 능(동원 이강릉)

익릉(翼陵) : 19대 숙종 원비 인경(仁敬)왕후(1661-1680. 19세)의 능(단릉)

대빈묘(大嬪墓) : 19대 숙종의 빈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 장(張)씨 (장희빈. 조선 20대 경종의 생모. 1659-1701.42세)의 묘(단묘)

 

 

 

서오릉 입구에서 명릉 들어가는 입구에는 제법 큰 오리나무가 여러 그루 눈에 들어온다. 가지 끝에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아름답다. 오리나무는 뿌리혹박테리아를 가지고 있어서 콩과 식물처럼 공기 중의 질소를 고정하여 양분으로 쓸 수 있다. 습한 곳을 좋아하고 잘 자라서 왕릉에 많이 심는 것 같다. 버드나무도 있다. 버드나무는 숙종 때 함경도에 홍수가 나서 제방에 버드나무를 심자고 하였던 나무이고,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연못가에 물고기를 넣은 버드나무 상자를 묻었다는 얘기도 있다. 입구에 도열한 나무를 벗어나면 숙종과 두 계비가 묻힌 명릉이 보인다. 원비 인경왕후는 언덕 너머에 자리 잡고, 장희빈은 조금 더 떨어져 있다. 그렇게 숙종은 다른 왕비 셋과 장희빈과 이곳 서오릉에 묻혀 있고, 숙빈 최 씨는 파주 광탄 소령원에 있다. 

 

조선의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숙종과 그 아들들은 재위 기간이 길어 파란만장하다. 숙종이 45년 10개월, 희빈 장 씨 소생 아들 경종이 4년 2개월, 숙빈 최 씨 소생 아들 영조가 51년 7개월로 100년이 넘는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긴 세월이다. 숙종의 비 셋은 모두 후사가 없고, 희빈 장 씨와 숙빈 최 씨가 본 아들이 경종과 영조이다. 명릉을 보면 장희빈과 다툼을 벌여 중전과 폐서인을 오간 제1계비 인현왕후는 숙종이 살아 있을 때 묻혔고, 숙종은 죽어서 바로 옆에 묻혔다. 숙종이 죽어 제2계비 인원왕후는 왕대비가 되고, 영조가 즉위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인원왕후는 오래 살아 며느리인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가 죽은 한 달 뒤에 국상 기간에 죽어 숙종이 묻힌 왼쪽 언덕 위에 따로 자리 잡았다. 자리가 좀 어색하긴 한데. 소생이 없는 탓도 있고 연유가 그러하였다.

 

숙종은 국방을 위해 성을 쌓거나 개축하고, 사육신을 복권시키고, 노산군을 복위시켜 묘호를 단종으로 올리는 치적이 있으나, 서인들이 집권한 가운데 숙종이 자리 잡기는 쉽지 않았다. 청나라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한때 북벌론이 등장하였다. 사대부들은 백성들의 민생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반대하였다. 가난한 백성들은 군포에 허리가 휘고 그런 부담이 없는 부유한 사대부들은 양보할 뜻이 없었으니 민생이나 북벌은 말 뿐이었다. 숙종도 백성의 삶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당파를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는데 골몰하였다. 숙종시대는 여인들이 등장하는 애증의 역사가 떠오른다. 왕비들은 모두 후사가 없어 그런 빌미가 없었지만, 장희빈이 아들을 낳자 숙종은 태어난 지 두 달 된 아들을 원자로 정하였다. 송시열은 인현왕후가 젊은데 시기상조라 하였다. 그런 말을 들은 숙종은 정권을 바꾸기로 하였으니 기사환국이다. 삼정승을 바꾸고 노론 정치인들을 유배를 보내고 송시열에게는 사약을 내렸다. 이와 관련지어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희빈 장 씨를 중전으로 올리며 정국은 요동친다.

 

남인의 세력을 업고 중전이 된 장 씨는 권력을 탐하고 탐욕을 부렸다. 숙종은 장 씨에 대한 애정이 숙빈 최 씨(영조의 생모)로 기울었다. 장 씨와 최 씨는 각기 남인과 서인의 대리 싸움에 등장한 여인들이다. 숙종은 다시 장씨를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위한 민 씨를 왕비로 복위시켰다. 숙종은 죽은 송시열을 복권시키고, 남인들을 조정에서 몰아냈다. 이것이 갑술환국이다. 숙종은 자신의 애욕을 정쟁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잦은 정권교체를 하였다. 왕비로 복귀한 인현왕후는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를 모시던 궁녀가 왕후의 폐비시절 애환을 쓴 소설이 인현왕후전이다. 희빈 장 씨에게는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하여 자진하라 하였으나 듣지 않자 사약을 내렸다. 뒤에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옥산부대빈으로 추존되어 묘를 대빈묘라 하였다. 대빈묘는 원래 구리 인창동에 있었는데, 숙종 때 광주 문형리로 옮겼다가 1970년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겼다. 숙종으로부터 승은을 입은 숙빈 최 씨는 파주 소령원에 묻혔다. 영조가 무수리 출신 생모 숙빈 최 씨를 왕비릉으로 격상시키려 하였지만 이룰 수 없었다. 조선은 명분이 없으면 조정 신료의 힘을 이겨낼 수 없는 나라였다. 

 

익릉은 숙종 원비 인경왕후의 능이다. 서오릉에 있는 왕릉 중에서 가장 넓고 크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는 지형에 맞추어 계단식으로 만들었다. 왕비는 전염병인 천연두를 앓아 발병 8일 만에 죽었다. 천연두는 마마라 하여 최상급 존칭을 붙일 정도로 무서웠던 병이다. 숙종은 천연두를 피해 창덕궁으로 가 있었다. 제1계비 인현왕후는 폐결핵으로 죽었고, 제2계비 인원왕후는 천연두를 앓아서 살아났지만 병의 흔적이 남았으니 숙종이 후궁들에게 마음을 두었던 모양이다. 숙종조는 당파의 격정장이고 왕비나 후궁도 그들이 추천한 여인들이라 정략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 여인을 모두 품었던 숙종이다. 그리고 죽어서도 같이 잠든 곳이 서오릉이다. 왕만을 위한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서오릉 입구

 

 

 

오리나무

 

 

 

명릉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능)

 

 

 

명릉 (왼쪽부터 제2계비 인원왕후능, 가운데가 숙종능, 오른쪽이 제1계비 인현왕후능)

 

 

 

명릉 문무인석 (2008.12)

 

 

 

명릉 혼유석 귀면

 

 

 

숙종 제2계비 인원왕후능 (2008.12)

 

 

 

 

익릉 (숙종 원비 인경왕후 능)

 

 

 

익릉

 

 

익릉 문무인석

 

 

 

익릉

 

 

 

익릉 참도와 정자각

 

 

 

목련

 

 

참빗살나무

 

 

 

대빈묘 (장희빈묘) (2008.12)

 

 

 

대빈묘 (경종 생모 장희빈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