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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곡 산 방 ( 鄕 谷 山 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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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과 숲 15. 고양 서삼릉 1. 회묘(懷墓.성종 폐비 윤씨), 희릉(禧陵.중종 제1계비), 효릉(孝陵.인종)

향곡[鄕谷] 2021. 12. 16. 12:46

 

릉과 숲 15

 

고양 서삼릉 1. 회묘(懷墓. 성종 폐비 윤 씨), 희릉(禧陵. 중종 제1계비), 효릉(孝陵. 인종)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 40-3 

 

 

회묘(懷墓) : 조선 9대 성종(成宗) 폐비 윤(尹)씨 (성종의 둘째 부인, 연산군의 어머니. 1445-1482.37세) 묘 (단묘) - 비공개

희릉(禧陵) : 조선 11대 중종(中宗) 제1계비 장경(章敬) 왕후 윤(尹)씨 (1491-1515.24세) 능 (단릉)

효릉(孝陵) : 조선 12대 인종(仁宗. 중종의 첫째 아들. 1515-1545(30세). 재위 8개월(1544.11-1545.7))과 인성(仁聖) 왕후(1514-1577.63세) 능(쌍릉) - 비공개

 

 

 

서삼릉 입구인 삼송리는 외곽으로 가는 주요 갈림길이다. 아주 오래전 삼송리 버스정거장에서 내려 먼지 풀풀 덮어쓰고 먼길을 걸어서 가기도 했다. 삼송리는 마을에 수호신 역할을 하는 큰 소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 하여 세솔마을이었는데, 한자로 삼송(三松)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그 소나무는 없어지고, 삼송역 전철이 지나는 신도시로 변하였다. 버스종점에서 서삼릉 넘어가는 길은 은사시나무가 바람에 흔들려 바람 노래를 부르던 곳이다. 은사시나무는 은백양과 수원사시나무를 교배하여 만든 우리 나무다. 임목육종학자인 현신규 박사가 만든 나무라 하여 현사시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잎 뒷면은 하얀 털이 나서 부드럽다. 2년 만에 갔더니 그 은사시나무 가로수는 보이지 않는다. 그 고개를 넘어서면 원당종마목장이 있고, 그 뒤로는 철망을 사이에 두고 왼편에 서삼릉이 자리 잡고 있다. 목장과 서삼릉 너머 골프장은 서삼릉 영역이었으나, 개발의 시대에 능역은 줄고 줄었다. 서삼릉은 '서쪽에 있는 3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장경왕후 희릉, 인종의 효릉, 소현세자의 소경원, 철종의 예릉이 조성되었다.

 

그곳에는 역사와 소설에서 자주 듣는 이름 폐비 윤 씨가 묻힌 회묘(懷墓)도 있다. 윤씨는 한미한 양반집 딸로 집안이 궁핍하자 궁에 들어갔다. 성종보다 열두 살 연상이지만 미모로 성종 4년에 숙의가 되고, 원비인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책봉되던 해에 연산을 낳았다. 성종은 야행을 즐겨 규방 출입이 잦자 모처럼 윤비 처소에 든 성종에게 대들다가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약을 받고 죽는다. 연산군 즉위 후를 생각한 성종은 묘비는 세우게 했다. 임종을 눈앞에 둔 성종은 사후 백 년 동안 폐비에 대한 일을 입밖에 내지 말라했지만, 성종 국장기간에 연산군은 그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후 두 차례 사화로 신하들에게 참혹한 형벌을 가하고, 윤 씨의 묘는 회묘에서 회릉으로 격상시켰다. 그러나 1506년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자 회릉은 다시 회묘로 바꾸지만 겉모습은 그대로 두었다. 회묘는 원래 서울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에 있었으나 1969년 왕실의 묘가 가장 많이 있는 서삼릉으로 옮기게 되었다. 묘 이름이 품을 회(懷)이다. 마음속에 품은 것을 중전의 덕으로 녹이지 못하여 나라를 어지럽게 한 여인이다. 회묘는 비공개지역이다. 사전에 신청을 하고 허가를 얻어야 들어갈 수 있다.    

 

희릉(禧陵)은 제11대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 능이다. 윤 씨는 궁중에 들어가 숙의로 있다가, 원비 단경왕후 윤 씨가 왕비에 오른 지 7일 만에 폐위되자 왕비가 되었다. 윤 씨는 8년간 왕비로 있다가 세자(인종)를 낳고 산후병으로 24세에 세상을 떴다. 자애롭고 총명하고 어질고 덕이 있었고 중종과 금술도 좋았다. 국상을 당해도 왕은 상복을 입지 않는데, 장경왕후가 죽자 중종은 상복을 입고 애통해하였다. 능은 헌인릉 자리에 썼으나 무덤 아래 큰 돌이 있어 불길하다고 하여 능 조성 22년 후에 현재 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중종이 죽자 제1계비 옆에 능을 조성하고 능호를 정릉(靖陵)으로 정했다. 그러나 제2계비 문정왕후가 풍수상의 이유를 대며 중종을 지금 삼성동으로 옮기고 훗날 자기와 같이 묻히도록 하고, 장경왕후가 있는 능은 다시 희릉이 되었다. 결국 물이 많아 문정왕후는 그곳에 묻히지 못하였다. 왕의 무덤을 정하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무덤을 옮기는 것도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러면 누군가에게 죄를 물어야 하니 쉽지 않은 일이다.

 

효릉(孝陵)은 인종과 부인 인성왕후가 묻힌 능이다. 희릉에 묻힌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오래 살라고 억명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그 보람도 없이 인종은 태어난 지 7일째 어머니를 여의고, 왕위에 앉은 것은 8개월 보름으로 조선 왕 중 최단기간이요, 서른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셋이나 자녀는 하나도 없다. 단종, 인종, 경종, 순종이 자녀가 없다. 어진 어머니를 닮아 조선조 제일의 효자 왕으로 이름나 있다. 중종이 병이 들자 어의가 몰린 약을 먼저 맛을 보았고, 직접 병수발을 하고, 목욕 후 쾌유를 비는 기도를 새벽까지 하였다. 그래서 묘호는 인종(仁宗)이요, 능호는 효릉(孝陵)이다. 세자 생활은 24년이었고, 제2계비 문정왕후가 수차례 죽이려 하였다. 그는 죽이려 하면 기꺼이 죽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래서 인종이 죽자 독살설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도 죽기 전에 이복동생(명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장례는 검소하게 치러 부모 곁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왕이 아니라 고승대덕이었다면 맞을 인물이다. 효릉은 중간에 있는 토지가 문화재청 소유라 아니라 관람로 연결이 어려워 비공개지역으로 남아 있다.

 

서삼릉 정문 앞에는 큰 오리나무가 있고, 희릉 들어가는 좌우에도 오리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습한 지역에서 잘 자라는 나무이다. 뿌리혹박테리아를 가지고 있어 빨리 자란다. 빨리 익거나 큰 것을 올되다고 하는데, '올'의 옛말이 '오리'이다. 빨리 자란다고 오리나무가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사이에 키가 큰 신나무도 있다. 단풍나무보다 단풍이 곱다고 색목(色木)이 '색나무'가 되었다가 신나무가 되었다. 물푸레나무는 '물을 푸르게 하는 나무'라는 뜻인데, 동의보감에서는 우려내어 눈을 씻으면 정기를 보하고 눈을 맑게 한다고 하였다. 껍질을 삶은 물로 먹을 갈아 먹물을 만들기도 한 나무다. 그 밖에도, 때죽나무, 느티나무, 참빗살나무 등 큰 나무들이 좌우에 도열하여 능을 호위하고 있다. 바로 밖은 목장이라 말똥 냄새가 좀 날 것 같고, 능역도 좁다. 이왕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니 과거에 줄어들었던 능역이 회복되었으면 한다.

 

 

※ 대중교통 : 3호선 삼송역 5번 출구에서 마을버스 041번 이용 종점에서 내려 10분 걸어가야 함

 

 

 

 

 

서삼릉 안내도. 오른쪽 초록 지역만 관람할 수 있고, 왼쪽 초록부분은 사전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오리나무

 

 

 

희릉

 

 

 

물푸레나무

 

 

 

때죽나무

 

 

 

느티나무

 

 

 

희릉

 

 

 

희릉

 

 

 

희릉

 

 

 

희릉 문인석

 

 

 

희릉 무인석

 

 

 

참빗살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