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과 숲 13
서울 태릉(泰陵. 중종 세 번째 왕비)과 강릉(康陵. 명종)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릉(泰陵) : 조선 11대 중종(中宗)의 세 번째 왕비 문정(文定) 왕후 윤(尹)씨 (1501-1565.64세)의 능 (단릉)
강릉(康陵) : 조선 13대 명종(明宗. 중종의 둘째 아들. 경원대군. 1534.5-1567.6(33세). 재위 1545.7-1567.6(21년 11개월))과 인순(仁順) 왕후 심(沈)씨(1532-1575. 43세)의 능(쌍릉)
태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세 번째 왕비인 문정왕후가 묻힌 능이다. 주변은 선수촌, 사격장으로 터가 줄어들고 어수선한 곳이었다.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자 태릉이 왕릉군의 하나로 관심을 받고 있다. 전철 태능역 입구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이면 태릉에 닿는다. 여느 왕릉처럼 소나무와 참나무가 많다. 정조 때에 와서 왕릉마다 소나무를 더 심고, 도토리나무의 밀도를 관리하도록 정하였다. 이곳 소나무는 곰솔처럼 줄기는 검은빛이 나고 잎은 짙푸르다.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난 숲으로 들면 열매가 많이 달린 철쭉이 줄을 서 있다. 철쭉은 조선 태조부터 사랑한 나무다. 왕릉에서는 고추나무도 자주 본다. 임진왜란 이후 고추가 들어왔고, 고춧잎과 비슷하여 그 이후 이름을 받았을 테니, 수천 년 이름 없이 자란 나무이다. 어린잎을 나물로 쓰는데, 열매가 좋아 심었을 것이다. 열매를 보기 위해 심은 참빗살나무와 작살나무도 여럿 있다.
숲을 돌아 홍살문으로 가면 정자각 옆에 큰 향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향을 제사용으로 주로 쓰지만, 조각용으로도 쓰고, 땅에 묻기도 하였다. 땅에 묻는 매향(埋香) 의식은 미륵보살에 공양하고 내세에도 깨끗한 세상으로 태어날 것을 염원하기 위한 불교의식인데, 문정왕후가 불교에 심취하였기에 능 앞에 향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중종은 왕비가 셋이다.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 신 씨는 반정에 반대한 신수근의 딸이란 이유로 반정 7일 만에 쫓겨나고, 제1계비 장경왕후 윤 씨는 세자(인종)를 낳고 7일 만에 죽어, 문정왕후 윤 씨가 세 번째 왕비로 들어왔다. 중종은 죽어서 두 번째 왕비인 장경왕후와 고양 정릉(靖陵)에 묻혔는데, 문정왕후는 풍수에 안 좋다는 이유를 들어 중종을 봉은사 곁인 지금 삼성동으로 옮기고 뒷날 자신도 이곳에 묻히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대가 낮아 물이 들어와 터를 조성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고, 문정왕후가 죽자 아들 명종이 지금 태릉에 능 자리를 마련하였다. 원비는 복원되었고, 왕비는 각기 다른 능에 묻혔으니, 중종은 죽어서 어느 왕비도 같이 있지 못하였다.
문정왕후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명종 때이다. 아들 명종이 11살에 왕이 되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불교를 중흥하기로 하고 고승 보우를 맞아들이고, 선 ·교 양종을 다시 일으키고 승과를 실시했다. 서산대사가 승과로 등용되고 나중에 사명대사도 들어왔다. 유생들은 종단과 승과를 폐지하라고 연일 상소를 올렸다. 문정왕후가 죽자 보우는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피살되고, 불교중흥은 다시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이때 배출한 인물에 의해 임진왜란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문정왕후는 유생과 대립하였고, 아들 명종이 왕이 되었을 때도 종아리를 때렸다고 할 정도여서, 조선의 측천무후, 철의 여인, 질투의 화신 등 여러 별명을 얻었다.
태릉 서편 소나무길을 돌아 태능 앞에 돌아오니 겨울에도 푸른 잎을 달고 사는 겨우살이가 눈에 들어온다. 결실의 계절이라 연한 노란색 열매도 달고 있다. 숲길 입구에는 팥배나무가 새들에게 먹이를 아낌없이 주고 있다. 11월 한 달 개방하는 숲길은 참나무 종류가 도열하여 길은 낙엽이 수북하다. 가을참나무가 갈참나무가 되었다는데,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로 시작하는 노래 가사에,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에서 '갈잎'은 갈참나무 잎으로 짐작하고 있다. 숲길 언덕은 불암산에서 내려오는 줄기 끄트머리다. 산에서 내려오는 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산길에 노간주나무가 깜장 열매를 달고 있다. 향나무와 달리 잎이 모두 바늘잎인 노간주나무는 열매가 다음 해에 까맣게 익는데 그 맛이 달다.
문정왕후가 묻힌 태릉에서 숲길 언덕을 넘으면 아들 명종이 묻힌 강릉(康陵)이다. 명종은 중종의 둘째 아들로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가 서른세 살에 낳은 아들이다. 제1계비가 낳은 아들 인종이 후사 없이 서른에 승하하자 문정왕후의 독살설이 퍼졌다. 9년 동안 어머니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있었고, 을사사화, 양재역 벽서 사건, 임꺽정의 출현, 을묘왜변 등 나라가 편할 날이 없었다. 22년간 왕위에 있었지만 어머니가 죽은 후 친정은 2년이었다. 명종 때는 자연재해가 많았고 도적떼가 많았다. 명종 때 간행한 〈구황촬요 救荒撮要〉에는 흉년에 대비하여 백성들이 평년에 비축해 놓은 것으로 솔잎과 느릅나무껍질도 있었다. 명종 때의 도적 임꺽정은 관아를 털어 양곡을 백성에게 나눠주어 백성들은 의적이라 하였다. 명종실록에서도 그들이 도적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라고 하였다. 임꺽정은 평민에게는 의적, 양반에게는 도적이었다. 전국 5도를 누리던 임꺽정은 체포령이 내린 지 3년 만에 붙잡혀 명종 17년(1562년)에 처형되었다.
명종은 어머니가 죽자 권력을 농단하던 윤원형 일파를 제거하고, 불교의 양종을 폐지하고 자신의 정치를 펼치려 했다. 명종시대의 인재였던 퇴계를 중용하려 했지만 퇴계는 사양하였고, 몸이 쇠약해진 명종은 서른세 살에 세상을 떴다. 명종은 7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인순왕후로부터 아들 하나를 얻었다. 그러나 그 아들 순회세자도 12살에 요절하였다. 왕후에게서 난 자식이 대를 잇는 맥이 끊어졌다. 중종과 창빈 안 씨 사이에서 난 덕흥대원군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왕을 삼았으니 그가 선조이다. 명종은 살았을 때는 어머니 문정왕후에 휘둘렸는데. 죽어서도 어머니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동안 비공개능이기도 했다. 태릉이나 강릉은 문무인석이 크다. 조선시대 왕릉 중 가장 크다. 문무인석이 큰 왕릉은 두 왕릉 외에도 선조가 묻힌 목릉, 마지막 임금 순종이 묻힌 유릉에 것이 아주 크다. 왕 노릇을 못하는 왕들이 겉치레로 위엄을 표시하였다. 이는 곧 백성의 고통인데, 그걸 외면하였다.
※ 태릉과 강릉에서 본 나무 --- 우람한 향나무가 있다
고추나무, 진달래, 철쭉, 개나리, 화살나무, 참빗살나무, 백당나무, 작살나무, 음나무, 향나무, 겨우살이, 팥배나무, 신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상수리, 갈참나무, 굴참나무, 소나무, 노간주나무, 쪽동백나무, 때죽나무, 국수나무, 병아리꽃나무, 산벚나무, 귀룽나무
※ 교통편 : 6,7호선 태능 입구역 7번 출구에서 1155,1156, 82A, 82B 버스 이용 태릉 하차 (태능입구역에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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