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과 숲 10
구리 동구릉 1. 건원릉(健元陵. 조선 태조), 현릉(顯陵. 문종)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건원릉(健元陵) : 조선 태조(이성계. 1335-1408(73세). 재위 6년 2개월(1392.7-1398.9)의 능(단릉)
현릉(顯陵) : 조선 5대 문종[(文宗. 4대 세종의 맏아들. 단종의 아버지. 1414.10-1452.5(38세). 재위 2년 3개월(1450.2-1452.5)]과 현덕(顯德) 왕후 권(權)씨 (1418-1441.23세)의 능(동원이강릉)
동구릉은 1408년(태종 8)에 태조의 능을 쓰기 시작하여 9릉, 17위의 왕과 왕비, 후 비가 묻힌 능이다. 건원릉은 태조가 죽은 후 태종의 명을 받은 하륜이 정한 능지이다. 전하는 얘기로는 태조가 생전에 무학대사를 시켜 잡은 터라고 하며 돌아오면서 근심을 잊었다며(망우 忘憂) 얘기하였던 자리가 망우리가 되었다고 한다. 망우(忘憂)는 공자의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얘기인데, 공자가 자신을 일러 학문을 즐기면 근심을 잊어 늙음이 닥쳐오는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였다. 능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 동칠릉이라 하다가 문조의 수릉을 옮기면서 지금의 동구릉(東九陵)이 되었다. 능을 잡을 때마다 풍수가들이 보았을 텐데, 계속 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이곳이 길지인 모양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힘은 군사력이었다. 고려말 북쪽의 홍건적과 남쪽의 왜구를 물리치면서 이름을 얻고 민심을 얻었다. 요동을 차지하려는 고려와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으려는 명나라가 갈등하고 있었다. 고려왕조의 무능과 부패가 이어지는 와중에 명나라를 치기 위한 위화도 출병을 하였다가 회군하며 정도전의 이념과 결합하였다. 귀족의 땅을 백성에게 나눠주자는 토지개혁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토지문서를 불사르고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이성계는 선양 형식으로 왕을 받았다가 조선을 건국하였다.
태조는 왕으로 등극한 후 세자 책봉 문제를 부인 강 씨 의사대로 하였다가 왕조에 불을 지른 셈이다. 왕자들은 모두 사병을 가지고 있어서 그 불은 예견된 것이었다. 태조와 정도전은 명나라를 정벌할 결심을 하였다. 왕자들은 이것을 사병을 없애어 공적으로 흡수하면서 자신들을 없애려는 정도전의 계략으로 보았다. 이방원은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등 요동정벌파를 없애고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태조는 분노했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태조는 증오가 커져 함흥으로 떠났다. 무학대사의 노력으로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냉전기류는 이어졌다. 태조는 말년이 불우하였고 풍질에 걸려 세상을 떴다. 태조는 죽은 후 신덕왕후가 있는 정릉(貞陵)에 묻히길 원했지만 태종은 정릉을 아예 옮겨버리고 태조를 건원릉에 안장하였다.
문종은 재위 기간이 짧았지만 현군의 자질을 지녔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명필이고, 활도 잘 쏘고,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도 하는 등 여러 방면에 모범이었다. 재위 기간에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 역사서를 편찬하였다. 세종이 눈병 등 여러 병을 앓아서 죽기 전 7년 동안은 문종이 임금 역할을 대행하였다. 문종은 29년 동안 세자로 있으면서 격무로 몸이 힘들었다. 왕 노릇 준비하는 기간이 너무 길었다. 즉위 2년(1452년) 2월에 병석에 누웠고, 5월에 세상을 떴다. 문종의 죽음에도 음모론이 있다. 문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조선역사는 격동에 휘말렸다. 후궁으로 들어온 현덕왕후 권 씨는 세자빈으로 있을 때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3일 만에 죽었다. 문종은 세자시절 27세에 권 씨를 잃고 38세 죽을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 홀아비임금이었던 것이다. 종묘사직을 이어갈 왕이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았다니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다.
세자빈으로 죽었던 권씨는 시흥에 묻혔다가 문종이 즉위하자 현덕왕후로 추존되었다. 문종이 세상을 떠나 동구릉 자리로 들어오고, 현덕왕후도 옮겨서 합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현덕왕후 친정어머니와 동생이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었다 하여 현덕왕후는 서인(庶人)이 되고, 무덤을 파헤쳐 서인의 방식으로 장례를 지낸 후 내버렸다. 나중에 왕비로 복위되고 겨우 백골을 찾았으나 이제는 같이 묻히지 못하고 떨어진 거리에 묻혔다. 쌍릉이었다가 동원이강릉이 된 것이다. 세조가 집요하게 미워하여 태조와 반대인 자리로 명이 끊기는 흉당에 묻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래서 그러한지 단종 이후로 명이 끊겼다. 동구릉 능역에 두 번째 자리 잡은 능인데도 참도 홍살문 정자각 능침이 곧게 뻗어 있지 않고 직각으로 두 번 꺾여 있다. 문종 내외의 운명처럼 말이다.
건원릉은 태조의 능이다. 건(健)은 하늘의 도(道)이고, 원(元)은 나라나 도읍을 처음 세웠다는 뜻이다. 태종은 함흥에서 가져온 억새풀을 건원릉 봉분에 심었다. 태조가 마음 쉴 곳은 고향 함흥 땅이었고 함흥에서 난 풀이었다. 태종은 아버지가 부인 옆에 묻어달라는 말은 듣지 않았지만 억새풀을 심어 달라는 유언은 거절하지 못하였다. 11월 억새 절정기에 건원릉 능침을 2주간 선착순으로 개방한다. 봉분에 심은 억새풀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이 왕의 깃발이 휘날리는 듯 위엄이 있다. 건원릉을 조성하며 심은 나무가 소나무와 잣나무다. 왕릉에 심는 기본 나무가 그 나무들이다. 태조 이성계 하면 버드나무로 신덕왕후 강 씨와 만난 인연도 있지만 배나무와 인연도 많다. 왕업을 일으킬 것이라는 얘기를 무학대사로부터 듣고 대사가 지내던 곳에 절 석왕사를 세우고 배나무를 심었고, 연회에서 활쏘기를 청하자 나무에 달린 배를 활을 쏘아 떨어뜨리기도 하였다.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목자(木子.李를 파자한 단어)가 나라를 다스린다는 노래가 퍼졌다는데, 오얏나무(李)가 이 씨의 나무이다. 태조는 11월에 핀 철쭉이 신기하여 구경할만하다며 승정원에 내려주었다. 효자로 소문난 문종은 아버지 세종을 위하여 경복궁 후원에 세종이 좋아하는 앵두나무를 심었다. 그래서 세자 시절 문종이 살았던 자선당을 앵두궁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 밖에도 동구릉에서는 신나무, 때죽나무, 병아리꽃나무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봄이 되면 꽃길이 아름다운 곳이지만 가을에 왕의 숲길을 걷는 맛도 그에 못지않다.
※ 동구릉에서 본 나무와 풀 (봄, 가을)
⑴ 나무 : 개느삼, 개옻나무, 고로쇠나무, 골담초, 때죽나무, 매발톱나무, 미선나무, 비술나무, 신나무, 팥배나무, 물푸레나무, 오리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팽나무, 병아리꽃나무, 참빗살나무, 백당나무, 앵두나무, 노각나무, 쪽동백나무, 산수유, 생강나무, 잣나무, 전나무, 꼬리조팝나무, 화살나무, 쉬땅나무
⑵ 풀 : 으아리, 큰꽃으아리, 억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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