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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과 숲 9. 서울 연산군묘(燕山君墓)

향곡[鄕谷] 2021. 11. 11. 21:53

 

왕릉과 숲 9

 

서울 연산군묘(燕山君墓)

 

서울 도봉구 방학동

 

 

연산군묘(燕山君墓) :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燕山君. 성종의 첫째 아들. 1476-1506(30세). 재위 11년 9개월(1494-1506)]과 왕비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 신(愼)씨 1476-1537(61세)의 묘

 

 

 

 

연산군은 조선 제9대 왕 성종과 폐비 윤 씨 사이에서 난 첫째 아들이다. 7세에 세자가 되고, 문리를 터득하거나 정치를 알기에 이른 나이인 19세에 왕이 되었다. 그러나 왕이 된 후 성종시대 일어난 사치풍조를 없애기 위해 금제절목(禁制節目)을 만들어서 기강을 바로잡았다.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사가독서도 다시 시작하고, 국조보감을 편찬하여 후대 왕들에게 귀감이 되는 제왕 수업을 받도록 했다. 상평창을 설치하여 물가를 안정시키고, 국방에도 힘을 쓰는 등 나라를 화평하게 하려 하였고 퇴폐 풍조와 부패를 없애고자 하였다.  

 

연산군은 정치상황에서 우군인 사림을 억압하였고, 훈구파에게는 이용당하였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정치는 왕과 관리가 같이 통치해야 하는 것임을 부정하였다. 연산군이 사대부계급의 적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는 고립된 군주로 기댈 데가 없었다. 그러다가 생모 폐출에 대한 경위를 알게 된 후에는 패륜적 행위를 하고 두 차례 사화로 많은 선비가 죽었으며 사치와 향락이 이어졌다. 성균관과 절을 놀이 공간으로 바꾸는 이성을 잃은 만행을 하였다. 한글 투서가 있자 한글 사용을 못하게도 했다. 선발된 음악인인 흥청(興淸)이 있었는데 유흥의 대상이었다. 흥청망청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그러나 일부 부풀어진 면도 있다. 폐위 전해에 연산군일기에 흥청은 93명이라 했는데, 다음 해 연산군이 폐위될 때 1만 명이라 하였다. 이는 사대부가 흥청을 놀이와 색담 대상을 삼으려 접촉하는 것을 차단하고, 벼슬아치 집에는 가지도 못하게 하여 사노비를 만들거나 아내로 만드는 일을 못하게 했기 때문에 반정 권력이 부풀린 것으로 보고 있다. 폐위된 왕에 대한 기록은 실록이라 하지 않고 일기라 하기에 연산군일기라 한다. 연산군일기는 권력이 바뀌고 쓴 것이라 부풀려 썼다고 보는 것이다. 여하튼 백성의 원성은 높아지기 시작하여 중종반정으로 마침내 폐출에 이르렀다.

 

연산군은 강화 교동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귀양을 보낸 곳 집 주변에 탱자나무를 심어 가두는 형벌이 그것이다. 연산군의 네 아들은 연산군 폐위 후 반정세력의 강력한 요구로 모두 사사되었다. 장녹수 등 후궁들도 처형되었다.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은 반정세력에 포함되었으나 반정에 반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신수근은 누이가 연산군의 비 신 씨이고, 딸이 중종 비라서 이도 저도 못하였다. 매부를 폐하고 사위를 왕으로 세우는 일은 할 수 없다 하였다. 반정 후 신수근은 죽임을 당하고, 그의 누이인 연산군 부인과 중종 비는 일주일 사이에 모두 폐비가 되었다. 연산군은 유배 두 달만인 1506년 11월 서른 살에 세상을 떴다. 실록에는 학질이라 했지만 초겨울 학질이라니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부인 신 씨는 연산군 사후 7년 중종에게 간청하여 연산군을 교동도에서 방학동으로 옮겼다. 중종은 양식을 내려 이복형의 이장을 도와 왕자의 예로 장례를 지내게 했다. 연산군은 폐주라 묘호가 없고 능호도 없어 능이 아니라 묘이다. 세계문화유산 등재에도 제외되었다. 부인과 딸 내외, 그리고 궁주 조 씨가 묻혀 있다. 이 땅은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 땅이었는데, 태종의 후궁 조 씨는 태종이 승하하자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궁주의 작호를 받았다. 조 씨는 후사가 없어 임영대군이 제사를 맡고 있었다. 임영대군에게 외손녀인 부인 신 씨가 부탁하여 묘를 같이 쓰게 된 것이다. 주변에 주택이 들어선 터는 비좁지만 가족묘가 되었다.      

 

연산군은 시를 잘 쓰고 꽃을 좋아하였다. 그가 쓴 시에 '대궐 뜰 오동잎에 밤비소리 싸늘한데 / 귀뚜라미 귀뚤귀뚤 이내 수심 일으키네 / 한가로이 거문고에 새 곡조 올려보니 / 한없는 가을 시름 흥과 함께 굴러가네'라 썼다. 가을비 소리를 들으며 떠나는 것을 아는 듯했다. 그가 쓴 시는 130여 수로 실록에는 남아있지만 문집은 다 불태워서 없앴다. 연산은 철쭉을 후원에 심고, 단풍나무를 좋아하여 직접 시를 짓고 신하에게도 시를 짓도록 했다. 연산군 마지막 해인 재위 12년에는 세검정 부근 탕춘정에 새 정자를 짓고 산 안팎에 진달래를 심고 봄을 감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산이 묻힌 묘터는 좁아 진달래나 날아온 들꽃이 겨우 자라는 정도이다. 다만 바로 앞 공원에는 서울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노거수인 은행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가까이 있던 암나무를 30년 전에 잃고 홀로 살아가는 수나무이다. 서울특별시 보호수 제1호로 880년 된 나무로 알고 있었는데, 서울특별시 기념수로 다시 지정하기 위해 국립 산림과학원에서 수령 측정을 하였더니 600년 정도 되는 나무라고 하였다. 연산군이 옮겨오는 것을 보았을 나무다. 

 

 

※ 교통편 : 우이신설선 전철역에서 내려 도봉동 방면 북한산둘레길을 20여분 걸어가면 나온다

 

 

 

 

 

연산군묘 (2011.7.9) 연산군묘(왼쪽)와 부인신씨 묘(오른쪽)

 

 

 

연산군묘 (2017.9.21)

 

 

 

연산군묘 (2017.9.21)

 

 

 

연산군묘. 맨 위에 연산군 내외, 중간에 궁주 조씨묘, 아랫쪽은 사위와 딸 묘

 

 

 

 

연산군묘 앞 은행나무 (2021.6.9)

 

 

 

연산군묘 앞 은행나무. 바로 앞에 원당샘이 있고,뒤로 북한산 정상이 보인다

 

 

 

연산군 유배지 / 강화 교동도 (2014.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