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향 글향이 있는 산방

산을 걷고 길을 걸으며 세상을 배웁니다

향 곡 산 방 ( 鄕 谷 山 房 )

글곳간/선비마을 이야기 20

소가 듣습니다

소가 듣습니다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황희 재상이 아직 벼슬에 들기 전에 길을 가다가 농부가 소 두 마리를 몰고 밭갈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황희가 논뚝에서 농부에게 큰 소리로 물었지요. "어느 소가 일을 더 잘 합니까?" 그러자 논을 갈던 농부는 일을 멈추더니 황희에게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쪽 소가 더 잘 한답니다" 황희가 이상하게 생각하며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왜 작은소리로 얘기하지요?" 그러자 농부가 말했습니다. "비록 소라도 마음은 사람과 같습니다. 일 못한다는 소가 들으면 불평하지 않겠습니까?" 황희는 농사를 짓는 농부로 부터 훌륭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는 명심보감에서 배웠던 '귀로는 남의 그릇됨을 듣지 말고,눈으로는 남의 잘못을 보지 말고, 입으로는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말..

제자의 충고와 스승의 아량

제자의 충고와 스승의 아량 조선조 한훤당 김굉필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희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조광조와 사제의 연을 맺게 되었다. 하루는 한훤당 김굉필에게 꿩을 주고 간 사람이 있었다. 고달픈 유배생활에 몸보신이나 하라고 준 선물이었다. 한훤당은 꿩을 보자 어머니 생각이 나서 털과 내장을 정리한 고기를 햇볕에 말렸다. 그러나 솔개가 날아와 그만 그 꿩고기를 채어가고 말았다. 한훤당은 화가 나서 주의해서 지키라고 당부했던 계집종을 모지게 꾸짖었다. 스승의 노여움이 가라 앉은 후 제자인 조광조가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께오서 노모를 봉양한다는 정성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께서는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게 되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이를 보면 마음 속으로 스스로 반성한다고 하였습니다. 선생님께오서 ..

세한도와 의리

세한도(歲寒圖)와 의리 완당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는 국보 180호로 지정된 걸작이다. 푸른 소나무가 있는 외딴집 풍경을 그린 세한도는 160여 년 전 조선 헌종 때인 1844년 완당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자신의 제자인 이상적을 위해 그려주었다. 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연경에서 방대한 서적 128권을 구하여 풍랑을 헤치고 절해고도 제주도까지 두 번에 걸쳐 전달하여 김정희의 유배생활을 외롭지 않게 하였다. 김정희는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어렵게 귀한 책을 구해준 이상적의 인품을 보고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제일 늦게 낙엽 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그에게 그림으로 답례한 것이었다. 완당은 그림에 붙어있는 발문(撥文)에서 세상의 밀물 같은 권세와 이득에 쫓아가는 세상 인심에..

추사 김정희 입춘첩(立春帖)

추사 김정희 입춘첩(立春帖) 6세 어린 나이에 김정희가 그린 그림과 글씨를 보고 무릎을 쳤다는 박제가의 소문은 장안에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그러나 김정희의 소문을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당대 제일의 문장가이자 명신이었던 채제공(蔡濟恭)이었다. 일찍이 영조로부터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정조)의 충신이다'라는 극찬을 받았던 노 재상 채제공은 어느 날 추사의 집 앞을 지나다 대문 위에 걸린 글씨 한 점을 보게 되었다. '입춘대길(立春大吉)' 대문 앞에는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 쓴 입춘첩(立春帖)이 내걸려 있었다. 평범한 넉자의 글씨였으나 그 글씨의 뛰어남을 본 채제공은 평소 김노경의 가문과 대대로 좋지 않게 지내는 사이였으면서도 특별히 집으로 찾아 들어갔다. 김정희의 부친인 김노경에게 그 글씨의 주인공이 ..

퇴계의 제자 선택법

퇴계의 제자 선택법 퇴계는 주역(周易) 공부를 고향 토계에서 가까운 청량산 청량정사에서 하였다. 주역을 100독이나 하였다고 한다. 퇴계가 청량정사에 머물던 무더운 어떤 여름날 서원에서 심부름 하는 사람이 올라왔다. 어떤 두 사람이 퇴계 제자가 되겠다며 찾아 왔다고 하였다. 퇴계가 그 사람들을 청량정사까지 오라고 해도 되겠지만 자신이 토계로 갈 것이니 기다리라고 하고 서원으로 찾아갔다. 거리로 치면 삼십여리는 될 것이다. 두 사람은 합천에서 온 정인홍(내암 鄭仁弘)과 성주에서 온 정구(한강 鄭逑)였다. 퇴계가 올 때까지 정인홍은 땀을 흘리면서도 의관을 정제하고 곧곧하게 기다리고 있었고, 정구는 의관을 벗고 쉬고 있었다. 드디어 퇴계가 오고 인사를 나누었다. 퇴계는 정인홍에게는 힘에 겨우니 더 나은 스승을..

信義를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바꿔라

信義를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바꿔라 '信義를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바꿔라' 퇴계선생이 제자들에게 한 얘기이다. 퇴계 수제자에 유성룡이 있었다. 유성룡은 어릴 때 한양에서 살았는데 이웃에 이순신이 있었고 아주 막역하게 지냈다. 친구 간에 의리를 귀중하게 여기는 서로가 통했다고나 할까. 과거를 볼 때 무과를 보면 좋겠다고 권한 사람도 유성룡이었다. 임진왜란이 날 때 나라를 구할 사람을 추천하라고 했을 때,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이 정5품 정읍현감이었던 이순신을 정 3품 전라좌수사로 몇 단계 수직상승 추천하였다. 반대파로 부터 난리가 났었고 그것을 기화로 유성룡은 4번이나 파직을 당했고 이순신도 평생 핍박을 받았다. 유성룡은 파직에도 굳굳했다. 여하튼 그 후로 나라를 풍전등화에서 구할수 있었다. 이순신이 전장에 나가..

우리 부부를 사람답게 만든 어른 입니다.

우리 부부를 사람답게 만든 어른입니다 퇴계 어머니가 태몽에서 공자가 대문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낳은 사람이 7남 1녀 중 막내인 퇴계입니다. 퇴계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 이식이 세상을 떠났기에 어머니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지요. 퇴계는 어릴 때부터형의 잘못을 자기가 한 것으로 얘기하고 학문이 남 달랐기에 어머니는 퇴계가 학문의 길로 나가기를 바랐습니다. 퇴계는 어머니의 뜻도 있고 하여 과거도 보지 않고 있다가 느지막이 과거를 보았는데, 임금이 주는 벼슬을 몇 번 반려 끝에 할 수 없이 청송부사를 맡겠다고 하였으나 청송부사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단양부사 자리를 대신 주어 7개월 동안 하였다고 합니다. 벼슬자리를 그만두고 퇴계는 고향인 토계에 들어와 글을 읽었습니다. 퇴계는 부인과 사별 하고 난..

학생부군과 유인

학생부군(學生府君)과 유인(孺人) 제사 지낼 때 지방을 쓰는데 아버지는 학생부군(學生府君), 어머니는 유인(孺人)이라고 쓴다. 학생이란 아무 벼슬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편의 지위에 따라 주어지는 부인의 칭호가 품수마다 다르다. 이렇게 따라 얻은 것을 외명부(外命婦)라 하고 자신의 힘으로 따낸 부인의 칭호를 내명부(內命婦)라 한다. 상궁, 후궁은 내명부다. 외명부에서 가장 높은 칭호가 왕비의 어머니인 ○○부부인(府夫人)과 1품 재상의 아내인 정경부인(貞敬夫人)이고, 2품의 부인이 정부인(貞夫人), 3품 당상관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그 아래부터는 숙인(淑人), 영인(令人)으로 차례차례 내려가 8품의 부인이 단인(端人), 9품 말직의 부인 이 유인(孺人)이다. 그러니까 벼슬을 못해 학생이라 쓴 분의..

대추, 밤, 감을 제상에 올리는 이유

대추, 밤, 감을 제상에 올리는 이유 '더도 말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속담과 같이 가장 풍성한 철이 추석이다. 추석이 되면 조상의 슬기가 배어있는 제수(祭需)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과일을 쓸 때 최소 三色은 쓰도록 하여 대추, 밤, 감을 쓰는데 책에서 그 의미를 읽고서 감탄한 적이 있다. ○ 대추를 쓰는 이유 뒷마당에 있는 대추나무에서 대추 열매가 열릴 때 무심코 보아 넘겼지만, 대추나무에 꽃이 피면 비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반드시 열매를 맺고서야 그 꽃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으로 태어나 반드시 후손을 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폐백 때 시어머니가 신부 치마폭에 대추를 한 웅큼 던지는 것은 대추 열매 열리듯 자식을 많이 낳아 자손을 번창케 하라는 것이다. ○ 밤을 쓰는 이유 씨앗..

안동선비 420년의 기록 우향계안

[고문서…역사와의 대화]우향계안 한국인은 관계속의 자리매김과 사귐에 익숙하다. 모듬살이가 필수적인 농경이 그 토양이었다면 타자와의 조화로운 삶을 중시하고 “길동무 셋이면 그중에 내 스승이 있기 마련이다”고 한 ‘논어’의 말처럼 교유를 통한 인격의 성숙을 강조한 유학은 그 토양을 일군 자양이었다. 선인들이 그러한 취지에서 참여한 갖가지 사회적 모임을 아우를 수 있는 말이 다름 아닌 ‘계’이다. ‘우향계안(友鄕(결,계)案)’은 1478년(성종 9년)에 시작되어 1903년(광무 7년)까지 420여년 동안 이어진 우향계의 기록을 담고 있다. 계의 시작은 이증(李增) 등 안동의 5개 성씨 선비 13인의 모임이었다. 인물이 많고 산수가 뛰어난 고향에서 벗들이 모여 자연 속의 즐거움을 누리는 한편 서로 도의로써 인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