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태사묘(安東太師廟)
고려를 도와 안동을 있게 하다
경북 안동시 북문동

신라 하대에 가장 강성한 세력은 후백제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견훤이었고, 후발주자로 왕건이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안동은 삼국시대에는 고타야(古陀耶)라 했는데 신라 경덕왕 때부터 고창(古昌)으로 불렀다. 고창은 경주와 소백산맥 위로 가는 연결점이어서 후삼국 세력 간에 영향을 주는 곳이었다. 930년(고려 태조 13년) 병산(甁山. 안동시 와룡면 서지)에서 전투가 벌어질 때 태사공들이 고려를 도와 견훤을 협공하여 대승하였다. 그래서 936년 후백제가 멸망하고 고려가 완전 통일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왕건은 세 공신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을 등용하고, 고창의 이름을 '동쪽을 편안하게 했다'는 뜻으로 안동(安東)이라고 바꾸고 '군'에서 '부'로 승격시켰다. 아울러 세 공신에게는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성을 내렸다. 김선평은 신 안동 김 씨의 시조가 되었고, 권행은 원래 경주 김 씨였으나 안동 권 씨 성을 받아 시조가 되었다. 장정필(본래 이름 장길)은 안동 장 씨의 시조이다.
이 세 분의 위패를 모신 곳이 안동시청 북문시장을 거쳐 구 도심 쪽으로 가다가 보면 있는 삼태사묘이다. 삼태사가 세상을 떠난 후에 후세들이 그 공적을 기려 사당을 만들었다. 태사묘 입구 누각 건물인 경모루 옆으로 들어서면 태사묘로 들어갈 수 있다. 삼태사의 유물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별도의 건물인 보물각을 세워 보관하고 있다. 생전에 입던 옷, 그릇, 허리띠, 교지 등이 있다고 하나 평소에는 개방하지 않아 볼 수 없었다. 제사의 헌관은 삼성(三姓)이 돌아가며 한다고 한다. 세 분의 묘소는 서후면에 따로 있다.
안동은 그 뒤 복주(福州), 영가(永嘉), 길주(吉州) 등의 이름을 가졌으며, 고려말경 복주목(福州牧)을 제외하고는 1000년부터는 안동이란 이름을 계속 유지하였다. 지금 안동시청 현관에는 안동웅부(安東雄府)라는 현판이 있다. 안동은 안동부, 안동도호부, 안동대도호부란 이름은 가지고 있었지만 안동웅부란 이름을 가진 적은 없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서 두 해를 머물면서 안동에 대해 느끼는 마음을 표현한 글자이다. 공민왕이 겨울에 피난을 오면서 풍산 소야천 개울에 다리가 없었다. 그러자 인근 부녀자들이 나와서 개울에 엎드려 사람다리를 놓아 왕비인 노국공부를 건너게 했다. 이때 유래한 놋다리밟기는 정월대보름 민속놀이로 전승되고 있다. 사람들은 청량산에 공민왕사당을 만들고, 왕모산에는 왕모당을 만들었다. 이에 공민왕은 낙동강변에 영호루와 청량산 청량사 현판을 친필로 남겼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이 평정된 뒤에도 한동안 안동에 머물면서 절을 중창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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