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단종비)가 지내던 곳
서울 동대문구 숭인동 일원 (2013.6.12)
청계천 영도교-여인시장터-정업원터-청룡사-동망봉-자주동샘 (2시간)
청계천 물은 맑고, 크고 작은 물고기도 많다. 오리가 있었다면 물고기들이 남아나지 않을 텐데 물고기들이 살판났다. 은빛인 피래미 암놈은 물속을 휘저어 다니고, 붉그스레 한 투명한 빛이 배 밖으로 드러나는 피라미 수놈 불거지는 몸을 비비며 정답다. 이 개천도 임진왜란과 병자 호란 양난 후에 한양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자 물이 더러워지고 흙도 많이 쌓였다. 그래서 조선 영조 때 청계천 흙을 퍼내서 산더미처럼 쌓았는데, 그곳 동네 이름이 조산동이고 나중에 방산동으로 바꾸었다.
한 때 동대문운동장 야구장이 있었던 이간수문에서 청계천으로 발길을 옮기면 청계 7가와 8가 사이 옛날 빨래터 남쪽으로 놓여 있는 영도교가 정순왕후(단종비) 자취를 찾아가는 시작점이다. 얘기가 끄트머리부터 되었지만, 왕위를 잃고 영월로 가는 단종과 한양에 남은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가 헤어진 곳이 영도교(永渡橋) 다리다. 이름대로 영원히(永) 건너서(渡) 살아 생전 다시 보지 못하게 된 이별의 장소가 되었다.
영도교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쫓아가면 동관묘 가는 길인데, 벼룩시장이 생겨서 없는 것이 없다. 동관묘 못미쳐 숭신초등학교 교문 옆에 여인시장터란 표지석이 있다. 정순왕후 송 씨의 끼니를 위해 세명의 시녀가 동냥도 하고 채소장사도 하였는데, 이곳에서 채소장사를 하는 데 남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장터 여인들이 막아서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인시장터이다. 지금은 채소시장이 없지만 여전히 서민들의 생활의 소리가 가득하다.
지하철 동묘역에서 북쪽으로 가서 창신역 지나자 말자 루푸식 다리를 올라가면 정순왕후가 살았던 정업원터가 있다. 정순왕후는 이 터에서 1521년 82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다. 18세에 홀로 되어 긴 평생을 고난을 안고 살았다. 그로부터 250년 뒤에 영조(47년.1771년)가 이곳에 와서 정업원구기(靜業院舊基)라는 비각 글씨와 현판 글씨 前峯後巖於千萬年 (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오리)를 직접 써서 정순왕후를 기렸다. 그리고 또 250년 가까이 흘렀으니 500년 전의 일이 되었다.
정업원터 바로 옆 절은 고려 태조 때 창건한 천년 사찰 청룡사이다. 한양의 외청룡 산등성이에 지어 이름을 청룡사라 하였는데, 공민왕의 비 혜비와 조선초기 왕자의 난 뒤 세자 방석의 누나 경순공주가 있었고, 무학대사가 머물렀으며,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갈 때 정순왕후와 눈물의 이별을 한 곳이 이곳 절안 우화루(雨花樓)이다. 우화루나 심검당(尋劍堂) 그리고 곳곳에 달린 주련 글씨까지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는 고찰이다.
청룡사에서 나와 100여m 올라가면 사거리 갈림길인데, 오른쪽으로 300m 가면 동망봉이고 왼쪽으로 600m 가면 자주동샘이다. 동망봉 가는 길은 재개발계획으로 대부분 헐렸으며 남아있는 집들은 옷을 만드거나 가공하는 소규모 가게들이 있는 오래된 골목이다. 그 끄트머리에 동망봉(東望峰)이 있다. 여기에 정순왕후가 아침 저녁 올라와서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수십 년 세월 숨결과 눈물이 묻은 곳이다. 영조가 동망봉이라고 바위에 쓴 글씨는 일제 때 채석장이 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지금은 동네 분들이 올라와 운동하고 쉬는 장소로 되었다. 아름다운 장미꽃이 울타리를 만들어 동망봉을 황량하지 않게 하고 있다.
동망봉 오던 길로 내려가 명신초등학교를 지나면 자주동샘 내려서는 길이 있다. 비우당 뒤편에 샘을 자지동샘(紫芝洞泉)이라 하는데, 정순왕후가 이곳 샘물을 길러 옷감 염색을 하여 생활에 보태는 방편으로 삼은 곳이다. 이 샘을 자주샘물, 자주동샘이라 하고 바위는 자주바위, 이곳 골 이름도 자줏골이다.
샘 앞엔 우산각(비우당)이 있다. 바로 옆 쌍용그린아파트 자리에 있던 것을 이곳에 새로 지었다. 조선 청백리 유관(柳寬)선생이 집에 비가 새자 우산을 받치며 '일산(日傘)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디어 내느냐'고 했다. 그 일산은 임금으로부터 받은 우산이었다. 그 청빈한 집을 뒷날 사람들은 우산각(雨傘閣)이라 불렀다. 훗날 이 집을 물려받은 5대 외손 지봉 이수광은 우산을 펴 겨우 비를 가리겠다는 뜻으로 비우당(庇雨堂)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수광은 유명한 지봉유설을 쓴 학자로 이곳 산봉우리 지봉(芝峰)을 호로 삼았다. 청계천 영도교에서 자주동샘까지는 애틋한 이야기와 청빈한 삶이 묻어 있는 골이다. 발걸음을 옮기며 그 이야기를 다시 새기며 걸을 역사의 길이다.
청계천 영도교 /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 송 씨가 헤어진 곳이다
여인시장터 / 정순왕후 송씨를 도와준 채소시장터
정업원터 비각 / 정순왕후가 궁에서 나와 지내던 정업원터
청룡사 우화루 / 단종 내외가 눈물의 이별밤을 지낸 곳
동망봉 / 정순왕후가 매일 올라와 동쪽 영월 땅을 바라본 곳
동망봉 / 지금은 마을 사람들의 쉼터이다
동방봉에서 바라본 동쪽 / 영월은 여기서 450여 리 떨어진 먼 곳이었다
비우당 / 뒤편에 자주동샘이 있다
지봉 이수광이 지은 비우당기 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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