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향 글향이 있는 산방

산을 걷고 길을 걸으며 세상을 배웁니다

향 곡 산 방 ( 鄕 谷 山 房 )

글곳간 213

김영랑 시 '수풀 아래 작은 샘'

수풀 아래 작은 샘 김영랑 수풀 아래 작은 샘 언제나 흰구름 떠가는 높은 하늘만 내어다보는 수풀 속의 작은 샘 넓은 하늘의 수만 별을 그대로 총총 가슴에 박은 작은 샘 두레박을 쏟아져 동이 가를 깨지는 찬란한 떼별의 흩는 소리 얼켜져 잠긴 구름 손결이 온 별나라 휘흔들어버리어도 맑은 샘 해도 저물녘 그대 종종걸음 훤듯 다녀갈 뿐 샘은 외로워도 그 밤 또 그대 날과 샘과 셋이 도른도른 무슨 그리 향그런 이야기 날을 세웠나 샘은 애끈한 젊은 꿈 이제도 그저 지녔으리 이 밤 내 혼자 나려가볼꺼나 나려가볼꺼나 (1903-1950) 본명은 윤식(允植) 전남 강진 출생. 1915 강진보통학교 졸업 1917 휘문의숙(徽文義塾) 입학 1919 3·1 운동 직후 휘문의숙 중퇴, 강진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 1..

박목월 시 '산이 날 에워싸고'

산이 날 에워싸고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3인 공동 시집 {청록집}, 1946) 1916년 경상북도 경주 출생 1933년 대구 계성 중학교 재학 중 동시 이 {어린이}에, 가 {신가정}에 각각 당선 1939년 {문장}에 , , 등이 정지용의 추천으로 등단 1946년 김동리, 서정주 등과 함께 조선 청년 문학가 협회 결성, 조선 문필가 협회 사무국장 역임 1949년 한국 문학가 협회 사무국장 역임 1957년 한국 시인 협회 창립 1973년 {..

김소월 시 '산위에'

산(山) 위에 김소월 산(山) 위에 올라서서 바라다보면 가로막힌 바다를 마주 건너서 님 계시는 마을이 내 눈앞으로 꿈 하늘 하늘같이 떠오릅니다 흰 모래 모래 비낀 선창(船倉)가에는 한가한 뱃노래가 멀리 잦으며 날 저물고 안개는 깊이 덮여서 흩어지는 물꽃뿐 안득입니다. 이윽고 밤 어두운 물새가 울면 물결조차 하나 둘 배는 떠나서 저 멀리 한바다로 아주 바다로 마치 가랑잎같이 떠나갑니다 나는 혼자 산(山)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해 붉은 볕에 몸을 씻으며 귀 기울고 솔곳이 엿듣노라면 님 계신 창(窓) 아래로 가는 물노래 흔들어 깨우치는 물노래에는 내 님이 놀라 일어나 찾으신대도 내 몸은 산(山) 위에서 그 산(山) 위에서 고이 깊이 잠들어 다 모릅니다

박두진 시 '도봉'

도봉 박두진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人跡)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먼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 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김장호 시 '두타산'

頭陀山 김장호 주는 자는 안다 저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며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인간을 떠나는 자는 안다 인간이 가진 것이 무엇이며 안 가진 것이 무엇인가를. 두타산에 오르면 내게 줄 것도 깨칠 것도 없다는 깨침. 그것은 三和寺뒤 武陵溪에 앉아서는 모른다. 未老川 天恩寺 터전에서 쳐다보기만 해서는 모른다. 땀을 흘리며 인두겁을 벗으며 용추폭을 거슬러 신령스러운 나비의 주검도 보고 문간재를 기어올라 망군대,청옥산 박달령을 건너질러 두타산 정수리에 머리카락을 날려본 자의 눈에만 보인다. 발아래 구비구비 푸샛 것들을 보듬고 정선골을 누비며 아리아리 아리리 젖줄을 물려주는, 주는 자의 기쁨 깨친 자의 비어 있음.

김장호 시 '오대산'

오대산 김장호 모래밭을 나갔던 개미가 발바닥을 데어 절름거리며 풀그늘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동해를 빠져 오대산에 올랐더니, 대궁이를 건들건들 저만치서 노란 원추리가 웃고 있었다. 쓰러진 朱木나무 가랑이 사이로 저승 나비가 쌍쌍이 나명들명 손을 비비고 있었다. 다섯 송아리 봉실봉실 둘러다 보면 虎嶺, 毘盧, 象王, 頭老, 東臺가 이승 설움 보듬어 올려 연꽃으로 뜨는데, 하마 저녁공양인가 발아래 상원사(上院寺) 종소리가 깃으로 돌아가는 새떼 날갯짓에 풀무질을 하고 있었다.

김장호 시 '겨울산은'

겨울산은 김장호 깨치는 자의 눈뜨는 소리 허울 벗는 소리로 한겨울 산속은 금가루를 날리며 이리도 소란한데, 챙겨 입느라 두텁게 매연까지 걸치고 소리를 죽인 하계(下界)를 내다보며, 벗어나야지, 벗어나야지, 벗어나는 자는 누구며 벗을 줄 아는 자는 누군가, 모를 일 없는 아는 일 투성이로 외투를 껴입은 안다는 사람 벗는 적 없고, 속임수만이 눈발처럼 휘날리는 이 헛헛한 세월 속에서 벗어나야지, 벗어나야지. 벗고 벗은 끝에 마지막 육신까지 벗는 날에도 이렇게 땀땀으로만 쳐다보게 되는 걸까 겨울산은.

김장호 시 '허망산타령'

허망산타령 (山 打 令) 김장호 산에서 내다보면 허망하구나 골고루 가을은 진무러져 녹슬었는데 하늘 아래 뫼인 것을 누가 모르랴. 머리 위에 하늬바람 소지(燒紙) 날리듯 눈발을 불러오듯 솔개 따라 가랑잎도 中天을 나는데, 물은 흘러내려서 썩고 바람은 도시의 상공을 뚫어내지 못한다. 언제부턴가 사람 새에 끼어서만 살 수 밖에 없도록 사람 사는 법도가 굳어진 것은. 인간을 떠나 높이를 겨냥하면 죽어서 되살아나는 크낙한 품속 이리도 황홀한 안도감인데, 하릴없다 허위단심 되내려가는 하룻길 산행(山行)또한 허망하구나 .

김장호 시 '운길산'

雲吉山 김장호 고향이 있는 사람이거나 없는 사람이거나 팔월 보름, 추석이면 천막을 여기 칠 일이다. 水鐘寺 옆구리 은행나무가지 사이로 은가루를 뿌린 듯 온통 달빛 아래 반짝이는 물살 무늬. 內雪嶽을 씻어 내린 북한강물이나 영월 평창 두메산골에서 흘러온 남한강물이 모두 합수하여 여기 양수대란 춤추거든. 이 가을 걷어 들일 한알 알곡이야 마음밭에 없더라도 가슴을 쓰다듬을 일이다 생명 있음의 고마움으로, 어버이 태워주신 고마움으로, 예까지 날 실어올려다 준 다리 성함의 고마움으로.

김장호 시 '희양산'

희양산 김장호 알몸을 햇살 아래 드러내어 놓아도 이름 자대로 엿볼 눈이 없구나 후미진 두메 소백산맥 안 고샅 은티재 너머 지름티재를 넘어 치맛자락 주름주름 홍문정 뒷골짜기 우러르면 눈이 부시다 휘황한 속살. 차갑다 부드러운가 손을 얹으면 고도감으로 발밑부터 떨린다. 손가락 끝으로 잡아라 바위눈금 끌어라 뒤꿈치. 광막한 테라스에 올라서면 두 날개 펴고 산줄기가 난다. 발아래 아스라이 솟구치는 바위벼랑. 문경에서 점촌에서 와야리로 와야지 도티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정 눈이 부시거든 오봉정으로 숨어들 일이다. 용초골 시냇물에 몸을 담그면 살구꽃 복사꽃이 제 물에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