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유성룡 인생의 수수께끼
충효당 / 서애 유성룡 종가 (서애선생 사후에 지은 집이다)
유성룡은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도주하려 할 때 도성 사수론을 주장하고, 선조가 평양을 버리려 할 때 평양결전론을 주장하고, 선조가 요동으로 도주하려 할 때 "대가(大駕)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나라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저지한 강경 주전론 자이다. 이런 유성룡에게 주화 혐의를 씌우고 이를 빌미로 실각시킨 데는 다른 배경이 있다.
선조도 그런 배경의 한 부분이다. 전쟁기간 내내 도주하기 바빴던 선조는 종전되기 전에 유성룡을 제거해야 했다. 종전 후 선조의 권위는 끝없이 추락할 것인 반면 유성룡의 진가는 하늘을 찌를 것이기 때문이다. 선조는 탄핵을 유도해 그의 실각을 부추겼다. 그런데도 유성룡이 공격당하는 것을 방어해주는 벼슬아치들이 드물었던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남는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유성룡 인생의 핵심이다.
그의 행적을 꼼꼼히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난다. 대동법이 그중 하나다. 광해군 즉위년(1608) 경기도에 시범 실시했다가 100년 후인 숙종 34년(1708)에 전국으로 확대 실시한 대동법은 임란 때 유성룡이 작미 법(作米法)이란 이름으로 이미 시행한 제도다. 고종 9년(1871) 대원군이 강행한 호포법(戶布法)도 마찬가지다. 호포법 실시 이후에야 양반들도 비로소 병역의무를 지게 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유성룡은 임란 때 속오군(束伍軍)을 만들어 양반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지웠다. 그뿐 아니라 천민들도 종군을 조건으로 면천해 주고 나아가 공을 세우면 벼슬까지 주는 신분타파책을 실시했다. 양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신분적 특권을 침해하는 이런 정책들에 격렬히 반대했다. 심지어 유성룡이 창안한 훈련도감에서 훈련 중인 노비들을 데려가는 행태까지 보였다. 나라는 망해도 사대부들의 계급적 특권은 침해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바로 여기에 유성룡의 실각을 둘러싼 의문의 해답이 있다. 유성룡의 이런 전시정책에 큰 불만을 갖고 있던 양반 사대부들이 선조와 공모해 유성룡을 실각시킨 것이다. 그가 실각 후 각종 개혁입법들이 무효화되었음은 물론이다. 「서애선생 연보」는 유성룡의 탄핵 소식을 들은 이순신이 "시국 일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는가"라고 탄식했다고 전한다. 유성룡이 실각한 선조 31년(1598) 11월 19일은 공교롭게도 그가 천거한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다.
전란 극복을 위해 자신이 속한 계급의 신분적 특권까지 타파했고, 결국 그 때문에 불행한 종말을 맞이한 유성룡. 그의 인생을 기존 당파나 양반 사대부들의 시각이 아니라 역사의 보편적 시각으로 되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인생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또한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 이덕일 지음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p6~8. (2007. '역사의아침'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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