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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순성길 ① 혜화동에서 낙산을 넘어 광희문으로

향곡[鄕谷] 2017. 3. 21. 11:41

 

서울 내사산 한 바퀴

한양도성 순성길 ① 혜화동에서 낙산을 넘어 광희문으로 

 

혜화동-혜화문-낙산-흥인지문-이간수문-광희문-장충동 (6.4㎞. 2시간 35분. 2017.3.20)

 

 

 

한양도성 순성길은 서울 내사산을 따라 세운 성곽을 걷는 길이다. 내사산(內四山)은 서울 안쪽에 있는 낙산(駱山.동),낙산(駱山. 동), 남산(南山. 남), 인왕산(仁王山. 서), 북악산(北岳山. 북)으로 그 산을 이어 한양도성(漢陽都城)을 세웠다. 조선을 건국하며 축성을 하고, 구한말에 전차를 도입하면서 성곽을 허물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에 성곽을 계속 파괴하였다. 그 뒤 1970년대 박정희시대에 복원을 시작하여 18.2㎞ 상당 부분을 완성하였다. 조선시대 정조 때 성곽을 한 바퀴 돌면 길하다고 하여 순성(巡城) 놀이가 유행하였다는데, 순성길은 그것으로부터 유래하였다.

 

혜화동 부근 도성은 학교나 집, 교회의 축대로 들어가 몇 군데가 조금씩 보일 이다. 도성의 북쪽이란 의미인 성북(城北) 동 쪽에는 최순우옛집, 만해의 심우장이 도성 바깥에 있다. 혜화문 쪽으로 오면 길을 내느라 성이 끊어졌는데 서울시장 공관도 도성 복원을 위하여 이사하였다. 동소문인 혜화문의 혜화(惠化)는 은혜를 베풀어 교화한다는 뜻이다. 함경도로 가는 경원가도의 관문 구실을 하였는데 여진족이 드나들던 문이라 그렇게 이름 지었을까? 대부분 문루 바닥에 그린 그림은 용인데, 이 부근에 새가 많아 새 중의 왕인 봉황을 그렸다고 한다. 돈암동으로 가는 전차길을 내면서 헐었다가 1994년에야 복원하였다. 본래 길이 아닌 언덕에 멀찍이 세워서, 사람 발길에서 좀 멀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혜화문에서 길을 건너면 카톨릭 신학대학과 붙어 있는 낙산(駱山)으로 오르는 길이다. 산 모양이 낙타등처럼 생겨 그리 불렀다. 그래서 일명 낙타산(駱駝山)이다. 동(東) 청룡에 해당하고, 조선시대에는 낙산 밑을 동촌(東村)이라 불렀다. 산은 낮고 평탄하다. 동으로 보면 단종비가 매일 올라 영월땅을 바라본 동망봉(東望峰)이 있고, 그 아래는 지봉 이수광이 살았다는 비우당(庇雨堂) 올라가는 지봉길이 보인다. 수년간 다녀보니 성안은 집을 새로 꾸미고 벽화마을이 생겨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 흥인지문 가까이 낙산성곽길은 교회도 나가고 새로 정비하였다. 최근에 성을 새로 쌓으며 각자(刻字)를 옆으로 옮겨놓았다. 훈련도감의 뜻인 훈국(訓局), 감독관인 일패두 절충(日牌頭 折衝) 장군 이름도 그대로고, 우두머리 석수(石手 都邊首) 이름도 보인다. 청나라 연호인 강희(康熙)도 보이는데, 찾아보았더니 강희 45년은 조선 숙종 32년(1706년)이었다.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내려왔다.  도성 8문 중 유일하게 평지에 세운 문이다. 동쪽이 낮으니 옹성을 두르고, 개천 양변에 가산(假山)을 세우고, 개천에 버드나무를 심고, 동대문에서 광희문 사이에 치성을 건설하고, 흥인문 현판에 갈지(之)를 넣어 세로로 세워 더 높게 보이게 하기까지 했다.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가 왕산로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길 위난에 처하자 13도 연합군이 서울을 다시 찾으려 격전을 벌인 곳이다. 그때 진격전을 지휘한 장수가 왕산 허위이다. 허위는 일제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처음 사형 당한 한국인이다. 왕산의 후손들이 안동으로 시집을 갔으니, 한 분은 이육사의 어머니요, 한 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손부이다. 독립의 열의와 피는 그렇게 이어갔다.  

 

흥인지문에서 옛 동대문운동장으로 가는 길에 오간수문터가 있다. 오간수문(五間水門)은 청계천에 있는 다섯 칸으로 된 다리다. 지금은 없어지고, 2008년 옛 동대문축구장을 발굴하다가 다른 다리인 이간수문을 찾아냈다. 빠르게 도시를 만들며 그렇게 없어진 문화재가 얼마나 많았을까? 도시를 세우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역사적인 건축물을 유지하면서 도시를 재생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다. 이제는 운동장에 디자인센터가 들어서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 되었다. 광희문으로 발길을 옮겼다. 도성의 동남문인 광희문은 물이 흘러나가고, 죽은 사람을 보내는 문이라 하여 수구문(水口門),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렀다. 이곳도 왕십리 전차길이 나고, 해방 후에는 퇴계로를 확장하면서 남으로 옮겼다. 광희문 남쪽은 주택을 매입하여 성곽을 100 여 m 복원하였으나 그 남쪽은 여전히 주택가에 묻혀 있다. 아직도 찾아야 할 옛날이 남아 있다.

 

 

 

한양도성의 동소문인 혜화문. 1994년에 복원하였다

 

 

 

 

낙산 성곽에서 보는 북쪽. 북한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양도성 낙산 구간

 

 

 

 

낙산 한양도성

 

 

 

 

낙산에서

 

 

 

 

흥인지문 주변

 

 

 

 

동대문 옆 낙산에 있는 성곽에 새긴 각자. 감독자 직책과 이름을 새겨 놓았다

 

 

 

 

개축 년월을 새겼다. 강희 45년은 숙종 32년(1706년)이다

 

 

 

흥인지문(동대문)

 

 

 

 

이간수문

 

 

 

 

광희문. '희'자는 빛날 희(熙)'에 획이 하나 더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이렇게도 썼다

 

 

 

 

학교 축대로 쓴 성곽 (혜화동)

 

 

 

 

교회 축대로 쓴 성곽 (혜화동)

 

 

 

 

주택 축대로 쓴 성곽 (장충동)

 

 

 

 

축성 초기에 쌓은 성곽

 

 

 

 

축성 후기에 쌓은 성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