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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순성길 ③ 인왕과 북악을 넘어

향곡[鄕谷] 2017. 4. 12. 15:17

 

서울 내사산 한 바퀴

한양도성 순성길 ③ 인왕과 북악을 넘어 

 

돈의문(서대문)터-경교장-인왕산(338m)-창의문-백악산(342m)-숙정문-말바위안내소-혜화동 (약 9㎞. 5시간. (2017.4.11)

 

 

 

지난 번 목적지인 돈의문터를 출발하여 경교장을 들러 인왕산 쪽으로 향했다. 일제 때 경희궁의 우 백호에 해당하는 숲을 허물고 경성측후소를 지었는데, 지금은 다른 기관이 들어섰다. 무어든 한 번 허물면 회복하기 여려운 것이다. 도성 서쪽엔 한양도성의 경계를 두고 무학의 야사가 전하는 선(禪) 바위가 보인다. 스님이 을 입은 모습이라고 그렇게 불렀다. 무학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아 선바위는 성 밖으로 밀려났다. 인왕산의 당초 이름은 서봉(西峰)이었는데, 조선 개국 후 인왕산으로 고쳤다. 인왕사(仁王寺) 절이 있어 인왕산인데, 정작 궁이 보인다고 연산군 때 절을 허물고, 산도 못 오르게 하였다. 인왕(仁王)은 불교의 수호신이기도 하니, 인왕은 한양의 수호산이기도 하다.

 

인왕산에서 '윤동주시인의 언덕' 쪽으로 내려왔다. 윤동주는 1917년 생이니 올해가 탄생 100년이 되는 이다. 죽는 날까지 우러러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그는 언덕 아래 누상동에서 몇 개월 하숙을 하였다. 짧은 생애에 가혹하고 음울한 시대를 이겨낸 시 덕분에 우리는 그를 기억할 수 있다. 인왕과 북악을 가르는 창의문은 인조반정 때 반군이 들어선 문이다. 창의(彰義)가 의(義)를 기리고 표창한다는 뜻인데, 반군들은 의(義)를 기치로 반정을 하였지만 의롭지 않았고 왕권을 허약하게 하였다. 

 

북악으로 오르는 계단은 제법 경사가 있다. 북악은 남산에 대응하여 부르는 이름이지만, 공식적인 이름은 백악산이다. 조선 초기에 백악신사(白岳神祀)를 두고 백악신에게 호국신이라 봉작하여 제사를 지내던이어서 백악이라 하였다. 백악마루 아래 청운대에서 남대문을 향해서 보면 경복궁과 세종로 거리가 일직선으로 뚜렸하다. 청운대 부근에는 1968년 북한 124군부대와 격전을 치르던 총탄 흔적이 소나무에 남아 있다. 청와대 뒷산까지 적군이 들어왔을 정도로 허술한 방비였다. 

 

순성길의 마지막 문루 숙정문(肅靖門)은 당초 숙청문(肅淸門)이었다가 바뀐 북대문의 이름이다. '숙정'은 공손히(肅) 다스린다(靖)는 것이다. 북쪽은 음기가 많아 도성이 문란진다고 막아놓아 사람이 출입하지 않은 문이었다. 음기가 많다고 기우제 때나 쓰는 문이었다. 문루 편액에 쓴 글씨들은 정치지도자들에게 필요한 덕목들이다. 그들이 한양도성이나 궁궐을 돌면서 그 뜻을 새겨야 할 일이다. 숙정문을 지나면 말바위안내소이고, 이내 성북동과 혜화동 경계이다. 성 안과 밖이 다르듯, 동네 안에서도 살림이 다르다. 봄볕에 새 잎이 돋아나고, 바람에 꽃잎이 날린다. 도성의 역사와 흔적들이 그 속에 있다.

 


교통편 : 5호선 서대문역 4번출구 (서울적십자병원 앞)

 

 

 

 

한양도성 인왕산 오르는 길

 

 

선바위

 

 

 

인왕산 정상에서 보는 북한산 원경

 

 

 

창의문. 인조반정 때 반군이 들어왔던 문이다

 

 

북악산 정상에서 본 인왕산

 

 

 

1.21사태 총격을 맞은 소나무

 

 

 

한양도성 각자(刻字) / 가경(嘉慶): 청나라 인종의 연호, 감관(監官): 감독자, 변수(邊首): 각 직종의 우두머리 등이 보인다

 

 

 

 

 

한양도성을 연대별로 볼 수 있는 구간이다. 태조,세종,숙종 때 쌓은 성돌이다

 

 

 

한양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

 

 

 

취병 / 식물을 소재로 만든 울타리

 

 

 

한양도성 혜화동 구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