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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과 숲 2. 서울 헌릉(獻陵.태종)과 인릉(仁陵.순조)

향곡[鄕谷] 2021. 9. 17. 10:16

 

왕릉과 숲 2

 

서울 헌릉(獻陵. 태종)과 인릉(仁陵. 순조)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34 (내곡동 산 13-1)

 

 

헌릉(獻陵) : 조선 3대 태종(太宗. 이방원. 태조 5남. 1367-1422(55세), 재위 17년 10개월(1400-1418.)과 원경(元敬) 왕후 민(閔)씨(생존 1365-1420. 55세) 쌍릉

인릉(仁陵) : 조선 23대 순조(純祖. 정조 2남. 1790-1834(44세), 재위 34년 4개월(1800-1834)과 순원(純元)왕후 김(金)씨(김조순의 딸, 생존 1789-1857(68세) 합장릉

 

 

 

 

헌릉과 인릉은 서울 서초구 남쪽 대모산 자락에 있다. 조선 태종 내외와 순조 내외가 묻힌 곳이다. 한 왕은 악역을 자처한 족적이 뚜렷한 임금이고, 한 왕은 사회 혼란기에 자리를 영위하기 바쁜 임금이었다. 태종은 조선을 개국하는데 힘을 바친 왕이라면, 순조는 힘이 빠져나가는 혼란기에 어쩔 수 없이 흘러갔던 왕이었다. 능 앞은 넓은 농원이 들어와 있고, 능 옆은 국정원이 차지하고 있다. 태종이 살아 있다면 자리가 좁다고 기가 막히다고 호통을 쳤을 일이다.   

 

고려말에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는 온건파와 급진파로 갈렸다. 온건파를 제거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 이방원(태종)의 역할이 컸다. 고려 충신을 격살하고,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아버지 이성계(태조)의 등극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형 방과(정종)를 거쳐 왕위를 받았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도전하는 세력은 공신과 외척까지 뿌리 뽑았다. 불교를 배척하는 등 아버지가 싫어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아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태종 재위 마지막 해에는 말썽꾸러기 세자 양녕을 폐위시키고 충녕(세종)을 세자로 삼았다. 양녕은 나중에 수양대군 편에 서서 장손인 단종을 내쫓는데 앞장을 섰으니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태종은 장자 상속을 원했으나 그것은 태종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정문에 들어서면 인릉 홍살문이 보이고 오리나무 숲길을 만난다. 바람에 나뭇잎이 소리를 내고 마른 잎은 떨어져 구른다. 백당나무 열매가 빨갛게 익어가고, 때죽나무는 곳곳에서 늘어지게 열매를 달고 있다. 오리나무숲길로 들어서면 하늘이 보이지 않고 바닥은 풀로 꽉 찼다. 오리나무와 참빗살나무와 들깨가 이 숲의 주인공이다. 바람이 불면 오리나무잎은 소리를 내고 깻잎이 향기를 낸다. 봉분 뒤에는 나무의 제왕인 소나무를 심고, 산불을 막으려 떡갈나무를 심고, 앞은 습지라서 습지에 강한 오리나무를 심었다. 오리나무는 비옥하면서 습한 토양에서 잘 자라는 나무다. 나막신과 하회탈을 오리나무로 만든 것은 물에 적응을 잘하고 나무질이 균일하기 때문이다.

 

오리나무 숲길이 끝나는 곳에 헌릉이 있고, 산책로를 돌아서 가면 헌릉을 옆에서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산책로 입구에는 미선나무가 색이 바랜 동전만 한 열매를 달고 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미선나무는 왕가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병아리꽃나무도 보인다. 까만 열매가 윤기를 내어 꽃만큼 귀엽다. 때죽나무가 줄을 선 산책로를 내려가면 헌릉으로 올라서는 길이다.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가 같은 언덕에 무덤을 달리 하는 쌍릉이다. 태종은 부인 원경왕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후궁이 많은 것을 불평하였고, 왕후가 남동생 넷을 부추기자 태종은 이들을 모두 처형시켰다. 합장을 하지 않고 쌍릉으로 만든 것이 그래서일까? 그래도 2개의 능은 난간석으로 연결하였다. 커다란 석물은 많고 석호(石虎)는 바깥을 보며 경호를 단단히 서고 있다. 대모산은 당초 대고산(大姑山. 할미산)인데, 태종을 이곳으로 모시며 대모산(大母山. 어미산)이 되었다. 칼로 권력을 잡은 왕이라 죽어서라도 부드러워지라는 것인가?  

 

헌릉에서 내려서면 바로 인릉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400년의 시차를 두고 조성한 두 왕릉은 석물(石物)에서 느끼는 분위기가 다르다. 헌릉에 석물이 씩씩한 기상으로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솜씨라면, 인릉에 있는 석물은 표정과 이목구비가 사실적이어서 조선 후기 석물 조각의 대표로 꼽힌다. 순조는 죽어 파주 교하에 있다가 풍수지리상 맞지 않다며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아버지 정조가 급살 하자 11살에 등극하여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여 신유사옥을 일으켜 수많은 남인을 처형시키고 정적을 몰락시켰다. 순조 때는 세도정치로 인사가 문란하여 기강이 무너졌고, 화재, 전염병, 수재, 홍경래 난 등 민란에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세도정치는 안동 김 씨부터 풍양 조 씨로 이어져 왕은 허수아비가 되었다. 세도정치 안동 김 씨는 경북 안동에 있는 김 씨가 아니라 서울 장동에 있는 장동 김 씨라 따로 부르는 가문을 본산으로 한다. 순원왕후는 헌종과 철종이 왕위에 오른 후 수렴청정을 하여 조선 왕비 중  유일하게 두 번 수렴청정을 하였다.

 

태종 때는 천재지변도 많아 지진, 홍수, 가뭄 등이 있었다. 가뭄에 애태웠던 태종은 자신이 죽는 날 혼이 있다면 비를 내릴 것이라 하였다. 이후 태종 기일인 음력 5.10 이면 비가 내려 이를 태종우(太宗雨)라 한다는데, 헌릉 혼유석 밑에 그 비가 고인다고 한다. 능역은 전체 공간 중에서 습지 공간이 차지하는 면적이 넓다. 대모산이 육산이라 약수터가 많고 물이 많은 곳인데, 풍수지리상으로도 그렇고 태종이 원하던 물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대모산에서 내린 습지를 이용하여 오리나무숲을 가꾸고 있다. 수고는 임금이 맡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성군이라 하듯, 후대까지 미치는 영향이 크다. 그것이 정치의 순한 물길이다. 대모산 헌인릉 부근을 흐르는 또 다른 물길 세곡천은 탄천을 지나 한강까지 흘러 들어간다.

 

 

 

헌릉과 인릉에서 본 나무와 풀 … 오리나무숲이 있고, 때죽나무, 참빗살나무, 들깨가 많은 곳

 

⑴ 나무 : 오리나무, 백당나무, 때죽나무, 참빗살나무, 쥐똥나무, 화살나무, 좀작살나무, 구기자나무, 신나무, 미선나무, 병꽃나무, 귀룽나무, 병아리꽃나무, 헛개나무, 졸참나무, 목련, 조팝나무, 소나무, 야광나무, 국수나무, 단풍나무, 산수유, 수국, 느티나무, 산딸나무, 백송, 왕벚나무

⑵ 풀 : 노루오줌, 들깨, 쥐 깨풀, 새박, 범부채

 

 

 

오리나무(자작나무과) / 습기 있는 산과 들에서 자란다. 사방오리에 비해 측맥이 7~11쌍으로 적다

 

 

 

인릉 / 순조와 순원왕후 능

 

 

 

인릉 정자각 잡상

 

 

 

때죽나무(때죽나무과) / 쪽동백나무에 비해 잎이 작고 꽃차례가 짧고 적은 수(1~6개)의 꽃이 달린다

 

 

 

오리나무 숲

 

 

 

새박(박과) / 새알처럼 생긴 작은 박이란 뜻의 이름으로 추정한다

 

 

 

참빗살나무(노박덩굴과) / 붉은색으로 익는 열매는 사각모양 구형이고 네 갈래로 갈라진다

 

 

 

오리나무가 지키고 있는 헌릉

 

 

 

헌릉

 

 

 

미선나무(물푸레나무과) / 한국특산식물. 개나리에 비해 꽃이 흰색이고 향기가 난다

 

 

 

병아리꽃나무(장미과) / 하얗게 피는 꽃의 모습을 귀여운 병아리에 비유한 이름이다

 

 

 

졸참나무 도토리

 

 

 

헌릉 /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헌릉 병풍석과 난간석

 

 

 

헌릉 무인석

 

 

 

 

인릉

 

 

 

 

인릉 문인석

 

 

 

 

인릉 소나무

 

 

 

야광나무(장미과) / 아그배나무에 비해 잎에 결각이 생기지 않는 점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