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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과 숲 4. 여주 영릉(英陵.세종)과 영릉(寧陵.효종)

향곡[鄕谷] 2021. 10. 20. 20:57

 

왕릉과 숲 4

 

여주 영릉(英陵. 세종)과 영릉(寧陵. 효종)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산 83-1(영릉로 269-1)

 

 

영릉(英陵) : 조선 4대 세종(世宗. 태종 3남. 충녕대군. 1397-1450(53세). 재위 31년 6개월(1418-1450))과 소헌(昭憲) 왕후 심(沈)씨(1395-1446. 51세) 합장릉

영릉(寧陵) : 조선 17대 효종(孝宗. 인조 2남. 봉림대군. 1619-1659(40세). 재위 10년(1649-1659))과 인선(仁宣)왕후 장(張)씨 (1618-1674. 56세) 동원상하릉

 

 

 

 

영릉 가는 길은 경강선이 생겨서 찾아가기가 나아졌으나 세종대왕릉역에서 다시 다른 교통편을 이용해야 한다. 여주시내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십여 리 여강길을 걸어서 영릉으로 갔다. 신륵사 앞 남한강 줄기를 여강(驪江)이라 하는데 여주(驪州)의 옛 이름 황려(黃驪)에서 나왔다. 영웅스런 기상을 가진 말인 황려(黃驪)가 있어 그것이 곧 고을 이름이 되었다. 밤새 약간 내린 비는 그치고 하늘은 맑고 길은 산뜻하다. 여주에 있는 왕릉은 한자는 다르지만 우리 말로는 같은 영릉과 영릉이고 합해서는 영녕릉(英寧陵)이다. 세종과 효종이 묻힌 곳이라 그렇게 부르나 보통은 세종대왕릉으로 부른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왕위에 올랐다. 세 살 많은 큰형 양녕대군은 폐세자 되고, 한 살 많은 형 효령대군은 동생이 세자에 책봉되자 절로 들어가 불교에 귀의하였다. 세종의 가장 큰 업적은 한글 창제이다. 한글은 후세 역사에 기틀을 세운 문자혁명이었다. 집현전 부제학 등 여러 학자가 한글 창제에 반대했던 걸 보면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 세종이 앞장서서 추진했던 일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있던 집현전을 지식경영의 기반으로 삼아 인재를 양성한 실체로 만들었다. 세종은 장인을 죽인 관리에게도 정치보복을 하지 않았고,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하여 천인도 등용하는 통솔력을 보였다. 다만 기득권이 반발하자 태종이 세운 종부법(아비가 노비면 자식도 노비)을 다시 종모법(어미가 노비면 자식도 노비)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양민을 늘려 세금과 병역의 대상을 확대하여 사회를 발전시킬 기회를 놓친 면이 있다. 밖으로는 대마도를 정벌하고 북방영토를 확장하는 결실을 얻고, 윤관이 개척한 북쪽 땅을 되찾았다. 여러모로 애민군주를 상징하는 왕으로 역사에 길이 남아 있다. 

 

매표소를 지나면 능 입구부터 소나무가 줄을 섰고, 가막살나무 열매는 빨갛게 가을이 깊었음을 알리고 있다. 나이 든 대신처럼 허리가 굽은 소나무가 많다. 능에 들어오는 소나무는 적당히 굽거나 아주 굽거나 대부분 그러하다. 연지 옆 키 큰 화살나무는 하늘이 푸르러 열매가 더 붉다. 소나무와 오리나무가 능 주변에 자리 잡은 대표 주종이다. 오리나무는 어수선하게 마른 잎을 매달고 가을을 일찍 마감하고 있다. 세종은 앵두를 좋아하여 세자인 문종은 궁궐 후원에 앵두나무를 길러 아버지 세종에게 앵두를 올렸다. 일에서 얻은 화와 열을 다스리는데  앵두가 좋다고 한다. 재실에는 책이 여러 권 있다. 세종은 책 속에 있는 지식을 정사에 응용하고자 하였다. 능 옆으로 오르면 능을 가까이 볼 수 있다. 소나무는 우람하고, 문무인석은 크고 선이 굵다. 세종릉은 원래 아버지 태종이 묻힌 헌인릉 서쪽에 모셨다(1450년). 사전에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였으나 불길한 일이 계속되자 19년 뒤 예종 1년( 1468년) 지금 자리로 옮겼다. 당시에 석물은 고려 양식에 가까워 선이 더 굵직하고 우락부락하다. 그때 석물은 무거워서 가져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묻었다가, 1970년대에 다시 파서 지금은 서울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관하고 있다.

 

세종대왕릉 동쪽 길은 효종릉으로 가는 왕의 숲길이다. 그 길에는 소나무가 대부분이고, 오리나무,버드나무,전나무,서어나무가 주루루 서 있다. 왕의 숲길에는 벚나무도 여럿 있다. 효종은 벚나무를 심도록 했는데, 벚나무 껍질을 화피(樺皮)라 하여 활의 재료로 쓰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숲길은 편안하다. 왕의 숲길이 끝나면 홍살문이 나타나고 효종과 인선왕후능이 보인다. 같은 언덕에 아래위로 묻힌 동원상하릉이다. 효종릉은 왕릉 중에 유일하게 홍살문을 지나서 금천교가 있다. 병자호란에서 이긴 청나라는 조선의 항복을 받고서 인조의 세 아들인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인질로 데려갔다. 셋째 인평대군은 다음 해에 돌아왔으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8년 뒤(1645년)에야 돌아왔다. 청나라에 있는 동안 소현세자는 막강한 청의 현실을 인정하고 실리외교를 주장하였고, 봉림대군은 반청(反淸)에 대한 생각이 더욱 깊어졌다.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봉림대군이 왕위를 이으니 효종이다.  

 

효종은 북별계획을 세웠으나 문신들은 공리 논쟁으로 세월을 보냈다. 양병은 안민(安民)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발목을 잡고, 백성을 위하는 대동법도 반대하여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양반 자제에게도 군역을 부과하려 서인 영수 송시열과 독대한 지 두 달 만에 효종이 갑자기 죽었다. 독살설은 그래서 나왔다. 효종이 급서 하자 사대부의 기득권은 유지되고, 상복을 입는 문제인 예송논쟁으로 또 세월을 보냈다. 효종은 죽어 서인의 주장에 따라 동구릉에 묻혔으나, 15년 뒤 남인들이 주장하여 1637년(헌릉 14년) 지금 자리로 옮겼다. 왕의 죽음과 이장에도 당파가 끼어들었다. 다음 해 인선왕후가 죽어 효종 아래쪽에 묻혔다. 곡장이 없는 것을 보면 같은 언덕이라 같이 쓴다는 의미일 것 같다. 효종릉 앞 재실엔 천연기념물인 회양목이 있고, 큰 느티나무와 향나무가 있다. 회양목과 느티나무는 나무속이 황갈색으로 왕을 나타내는 색깔이고, 향나무는 향을 가지고 있는 나무란 뜻인데, 신을 불러오는 매개체여서 썼을 것이다. 

 

영릉을 나와 영릉의 원찰인 신륵사로 갔다. 여주에서 가장 이름난 곳이 신륵사다. 세종은 아버지에 이어 불교를 더욱 억압하였다. 종파와 절을 축소 폐압하고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였다. 그러다가 말기에는 불교에 귀의하였다. 나옹선사가 입적한 신륵사이다. 나옹선사가 이곳에서 지내면서 강속에 사는 용마에게 굴레를 씌워 굴복시켰다 하여 '신륵'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 있다. 세종도 나옹선사의 시처럼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는 삶'을 깨달았을까? 신륵사 중에서 강변 경치가 좋다. 정자는 앉음새가 좋고 조망이 좋아 그곳에 오르면 마음이 넉넉해진다. 여강에 쌍무지개가 떴다. 모처럼 가까이 보는 아름다운 무지개다. 무지개는 잠시뿐이었다. 우리네 삶도 그러할 것이다. 모두 물처럼 바람처럼 지나갈 것이다.   

 

 

※ 영릉에서 본 나무 … 아름다운 소나무와 천연기념물 회양목이 있다

골담초, 백송, 가막살나무, 소나무, 오리나무, 버드나무, 전나무, 단풍나무, 귀룽나무, 목련, 물푸레나무, 노린재나무, 갈참나무, 느티나무, 향나무, 층꽃나무, 화살나무, 회양목, 감나무, 벚나무, 서어나무

 

 

 

여강

 

 

화살나무

 

 

 

가막살나무

 

 

 

오리나무

 

 

 

소나무

 

 

 

영릉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합장릉)

 

 

 

영릉(세종릉) 문인석

 

 

 

영릉(세종릉) 무인석

 

 

 

 

영릉(세종릉) 무인석 뒷모습

 

 

 

구 영릉(세종릉) 무인석 / 세종대왕기념관

 

 

 

구 영릉(세종릉) 문인석 / 세종대왕기념관

 

 

 

왕의숲길

 

 

 

영릉(효종릉) 금천교 / 홍살문 안에 참도 중간에 있다

 

 

 

영릉(효종릉)

 

 

 

영릉(효종비 인선왕후능)

 

 

 

영릉(효종릉) 문무인석

 

 

 

회양목(천연기념물) / 영릉(효종릉) 재실

 

 

 

느티나무 / 영릉(효종릉) 재실

 

 

 

향나무 / 영릉(효종릉) 재실

 

 

 

여강에 뜬 무지개 / 신륵사에서

 

 

 

나옹선사 부도 / 신륵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