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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곡 산 방 ( 鄕 谷 山 房 )

자연의 향기/자연의 말

상전벽해(桑田碧海) /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다

향곡[鄕谷] 2024. 8. 11. 11:36

 

말속에 자연 12

 

상전벽해(桑田碧海)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다

 

 

상전벽해(桑田碧海)는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었다는 말이다. 상(桑)은 뽕나무이고, 상전(桑田)은 뽕나무밭이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나면 그렇게 될까? 이 말은 그만큼 많이 변했다는 말이다. 도시화가 되고 개발이 되면 세상은 많이도 변한다. 상(桑)이란 글자를 보면 나무 목(木) 위에 손을 나타내는 우(又)가 여러 개 있다. 쉴 새 없이 먹어대는 누에를 키우려 밤낮으로 뽕잎을 따다 주어 손이 많이 갔던 것을 보여주는 글자이다. 누에가 있는 방에 누워 있으면 누에가 뽕잎을 먹는 소리가 사각사각 밤새도록 들린다. 

 

누에치기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다. 고구려 동명왕과 백제 온조왕, 신라의 박혁거세가 농사와 누에치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누에치기로 비단을 생산하는 것은 나라의 주요 산업이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수요는 더욱 늘어났다. 집마다 뽕나무를 심고 누에치기를 장려하였다. 잠실은 조선초에 나라에서 뽕나무를 심어 양잠을 하였던 곳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조선이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면서 풍수상 안산(案山)인 목멱산(현재 남산)이 누에처럼 생겼기에 누에가 경복궁을 잠식하지 못하게 하려고 잠실을 조성했다는 얘기다. 처음에는 서초구 잠원동 등 몇 군데 잠실을 만들었다. 지금은 송파 잠실이 그 이름을 대표로 남기고 있다. 해방 전까지 잠실 땅은 뽕나무밭이었고, 해방 후에도 강가에서 고기 잡는 사람들과 채소밭을 가꾸는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

 

 

 

1920년대까지 한강 물길에 섬들이 남아 있었다

 

 

서울 송파구 잠실(蠶室)은 상전벽해의 대표적인 예이다. 잠실은 잠실도(蠶室島)와 부리도(浮里島) 두 개 섬이 있었다. 부리도는 지금 아시아공원 일대다. 잠실도 북쪽으로는 신천강이 흘렀고, 남쪽으로는 송파강이 흘렀다. 신천강을 건너는 나루는 신천나루였고, 송파강을 건너는 나루는 송파나루였다. 1960년대 중반 한강종합개발계획에 의해 1974년 본격적으로 송파강을 메우기 시작하였다. 신천강은 넓히고 송파강은 메워 송파강 쪽 일부가 남은 것이 석촌호수가 되었다. 그 뒤에 한강에 홍수가 들면 지대가 낮은 쪽이 어려움이 있었다. 한강에 있었던 섬은 그 밖에도 난지도, 여의도, 저자도가 있었다. 닥나무 밭이었던 저자도는 강남 개발에 모래를 대느라 지도에서 사라졌다. 

 

 

 

 

잠실에서 40년 가까이 살았다. 잠실에 지하철이 들어오기 전이라 한 시간에 서너 번 있는 14번 시내버스를 타고 다녔다. 버스는 안내양이 있었고 늘 만원이었다. 13평 아파트는 오래 집을 비우고 연탄불이 꺼져도 옆집 온기로 따뜻하였다. 양철가림판으로 가렸던 공터는 나중에 롯데그룹 건물들이 섰다. 한강 모래밭에 가려면, 2차선인 강변도로에 있는 수동 신호기를 누르고 길을 건넜다. 모래밭 벤치에 앉아 저녁노을을 구경하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런 잠실이 이제는 대한민국 대표 아파트촌이 되고 몰라볼 정도가 되었다. 천지개벽할 정도이다. 뽕나무에 손이 많이 가듯 손이 많이 가면 변한다. 창해상전(蒼海桑田)도 세상이 몰라볼 전도로 바뀐 것을 비유한 같은 말이다. 한강 잠실지구에 가면 강가에 뽕나무를 다시 심었다. 그 나무가 언제 커서 님들이 뽕나무 밭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할 것인가.

 

  

 

재건축 전 잠실주공아파트 (13평형)

 

 

잠실 재건축 후 바뀐 아파트 모습

 

 

잠실 북쪽인 이곳 한강은 잠실 개발 전 신천강이라 불렀다 (2011.6.26)

 

 

종합운동장 건너 아시아공원 / 잠실 개발 전 부리도였던 곳


 

 

롯데타워 건축 모습 (2012.6.30)

 

 

잠실 롯데타워 (2016.9.19)

 

 

한강 잠실지구 (2016.12.3)

 

 

잠실에 새로 심은 뽕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