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속에 자연 11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백년해로 (百年偕老)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하라'. 결혼식장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백년해로(百年偕老)를 파뿌리에 비유하였다. 해(偕)가 '함께'란 뜻이고 노(老)가 '늙는다'는 것이니 '살아서는 같이 살고 함께 늙는다'는 것이다. 사모관대에 도포를 걸친 신랑에, 신부는 족두리를 쓰고 한복을 입고 하는 구식혼례가 있었다. 혼인 전에 오가는 혼서(婚書)는 부부의 해로를 바라는 의미에서 실로 묶었다. 그리고 함을 붉은 보자기에 쌌다. 부부가 얽혀 살라는 뜻으로 겉봉에는 근봉(謹封)이라 썼다. 혼인장소에는 '두 성이 합하니 만복의 근원(二姓之合 萬福之源)'이라는 문구를 붙였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맞절을 하고, 합환주를 마시는 등 절차가 따른다. 방법이 다를 뿐이지 서양식 결혼도 결혼서약을 하고 친지들 앞에서 공증을 받는다. 만남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려 일시로 만나 헤어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주례사에 등장하는 '파'는 중국원산의 식물이다. 파의 고형을 '바'로 보고 풀의 고형 '블'과 같은 풀의 일종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마늘처럼 알리신 성분이 있어 알싸하다. 알리신은 항균과 약리작용이 있어 민간에서 약재로 썼다. 통증을 다스리고 어혈을 풀고, 파뿌리는 감기에 달여 마셨다. 학창 시절에 봉사활동 하러 갔다가 발을 다쳐 동네 노인으로부터 대침을 맞은 적이 있었다. 침을 맞고 헝겊을 두르고 그 위에 대파뿌리를 으깬 것을 바르고 비닐로 묶었다. 이튿날 통증이 가시고 부기도 가라앉았다.
파는 서늘한 기후를 좋아한다. 더위에는 약한데 추운 밖에서 시퍼렇게 그대로 있다. 대파 한 단을 사서 화분에 심어 놓으면 오래 먹을 수 있다. 병충해에도 강하다. 쪽파는 농약도 치지 않는다. 몇 년 전 파값이 금값이었던 적이 있었다. 추운 것을 잘 이겨내는 파가 한파가 닥쳐 수확량이 떨어진 데다가 그전에 파 가격이 떨어진 기저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를 많이 다듬으면 매워서 눈물이 난다. 그럴 때는 파뿌리를 물고 있으면 눈물을 멈출 수 있다. 이파치파이다. 파로 파김치, 파전 등을 해서 먹는다. 파김치를 담그면 '파김치가 되었네'란 말처럼 맥을 못 추는 파이지만 입맛을 돋우는 데는 그만이다. 파를 잘 먹으면 백년해로를 할 수 있다는 면에도 그렇고, 대파를 뽑아보면 뿌리가 곱게 늙은 할머니 머리카락 같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해야 할 것이 여럿 있다. 그중 부부유별(夫婦有別)이란 말이 있다. 부부는 서로 공경하여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 부부의 도리를 잃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종묵이 쓴 책 '부부'를 읽다가 조선중기의 학자 민우수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경계하여 서로를 완성한다'를 좌우명 삼아 서로를 바른 길로 이끌고자 하였다. 그래서 음악을 알아준 사람처럼 아내를 지음(知音)이라 하고, 순종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바로 잡아주고 서로를 이해하는 외우(外友)라 불렀다. 민우수에게 부부는 가장 뛰어난 벗이요 인생의 반려자였다.
부부의 꿈은 백년해로하는 것이다. 배우자를 천생연분으로 알고 백발 노부부가 되어도 담소할 수 있는 것이 모두가 바라는 꿈이다. 서양에서 결혼 50주년을 금혼식이라 한다. 결혼 60주년 회혼연(回婚宴)은 중국에도 없고 우리나라에만 있다. 남양주 운길산 정상에 가면 정약용이 회혼연에서 지난 일을 회고한 시가 걸려 있다. 그 시를 짓고 얼마 뒤 정약용은 세상을 떴다. 언젠가는 이별의 시간이 온다. 김정희도 양사언도 이광사도 아내가 미리 죽고 아내의 존재가 큼을 알고 시를 남겼다. 그리고 수년 전 안동 이응태묘에서 나온 400년 전의 원이엄마 편지가 심금을 울렸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남도 우리같이 서로 어여삐 사랑하리'라며 서로의 사랑을 자랑하였던 슬픈 사랑의 편지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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