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속에 자연 24
호박꽃도 꽃이냐
이 세상 제일 큰 열매를 주었습니다
호박꽃도 꽃이냐고 그런다. 너무나 흔한 꽃이라 그렇게 조롱하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 호박꽃을 실제로 보면 노랗고 탐스럽다. 꽃살이 통통하고 푸근하다.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면 꿀 내가 난다. 어릴 때 아버지와 인분을 구덩이에 채운 후 흙을 덮고 호박씨를 심었다. 호박은 몰라보게 잘 자랐다. 덩굴에 아까시나무 막대기를 대기도 하고 가물 때는 우물에 가서 물을 퍼 날랐다. 잎 겨드랑이에서 나온 꽃대에 노란색 꽃이 피면, 벌은 호박꽃에 들어가 꽃가루를 이곳저곳 묻히고 나온다. 호박꽃은 벌이 양식을 구할 가장 넓은 꽃밭일 것이다.
호박은 남미 원산인데 임진왜란 이후 고추, 담배와 같이 들어왔다. 호박은 북쪽 오랑캐(胡) 지역으로부터 들어온 박이란 뜻의 이름이다. 6월이 되면 호박덩굴은 잘 뻗어나간다. 그때면 호박잎도 따고 애호박도 따서 먹는다. 호박잎을 쪄서 고추를 송송 썰고 된장을 얹어 쌈을 싸 먹는 맛은 기가 막히다. 호박이 굵어지면 밑을 받쳐 준다. 초가지붕과 담 위에 걸친 호박은 보기도 좋다. 햇볕이 좋을 때는 호박을 따서 호박고지도 만들어 놓는다. 호박은 한때 우리 식구에겐 귀중한 양식이었다.
친척 형님이 사촌누이를 보고 늘 놀려 댔다. '저런 걸 낳지 말고 호박이나 낳았더라면 국이나 끓여 먹지' 그랬다. 사촌 누나는 길길이 뛰면서 할아버지한테 일러바치면, 할아버지는 미소만 지으셨다. 누구나 그 누나 편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어른들은 농으로 '척 그러면 울 넘어 호박 떨어지는 줄 알아야지' 그런다. 눈치와 짐작으로 알아차리란 말이다. 서리 맞은 호박잎 같다고 측은해하기도 하였으나 형님의 놀림은 그치지 않았다.
호박은 행운과 시기의 대상으로 다 썼다. '굴러온 호박'이나 '호박이 넝쿨째 떨어졌다', '호박이 떨어져 장독으로 굴러 들어간다'는 말은 생각지도 않은 이익이나 행운이 생겼을 때를 말한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좋지 않은 비유에 많이 썼다. '호박씨 까서 한 입에 털어 넣는다'. '애호박에 말뚝 박기'. '호박나물에 용쓴다'. '호박잎에 고인 물에 빠져 죽을 팔자'. '못 먹는 호박 찔러보는 심사'. '뒤에서 호박씨 깐다'가 그런 말이다. 그러나 때론 '호박덩굴이 뻗을 적 같아서야'. '장마가 무서워서 호박을 못 심을까'처럼 경계나 교훈적인 말도 있다. 호박이 가까이 있듯 호박에 대한 말도 이처럼 많다.
시조시인 정완영이 지은 〈호박꽃 바라보며〉라는 동시가 있다. ' 어머니 생각'이란 부제가 달렸다. '분단장 모른 꽃이, 몸단장도 모른 꽃이 / 한여름 내도록을 뙤약볕에 타던 꽃이 / 이 세상 젤 큰 열매 물려주고 갔습니다'라고 썼다. 호박꽃이 호박을 생산한다는 평범한 말속에 어머니가 자식을 낳아 길러 주시고 떠났다는 말을 담았다. 호박꽃은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열매를 준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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