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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사당 /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향곡[鄕谷] 2009. 3. 7. 23:02

 

 

 논개사당 의암사(義巖祠)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전북 장수군 장수읍 두산리 (2009.3.7)

 

  

 

대전 통영 간 고속도로에서 장수 IC를 나와 장계면 대곡리 주촌에 논개 생가가 있다. 논개 묘는 생가에서 더 가야 하며, 사당은 읍내에 따로 있다. 장수 삼절(三絶)이 셋이다. 주논개(朱論介)가 있고, 임란 때 모두 도망을 갔을 때 장수향교를 불에서 지킨 향교지기 정경손(丁敬孫) 이 있고, 그리고 세종대왕 때 명정승 황희가 그들이다.

 

논개사당 의암사는 장수읍내에서 걸어서 10분이면 닿는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을 말끔하게 꾸미고 사당 호수도 아름답게 단장을 하였다. 사당 입구에는 산수유가 막 피기 시작하였 다. 오래된 일이라 기념관에 기념이 될만한 유물이 적다는 아쉬움이 있다. 논개나 남편 최경회에 대한 기록이 있는 문헌을 추가로 전시해 둔다든지, 생가나 묘소에 대한 사진이나 자료를 보강한다든지, 호숫가에 논개를 추모한 문인들의 시를 돌에 새겨 놓는다면 내실 있는 기념관이요 사당이 될 것 같다.

 

변영로 등 숱한 문인들이 그녀의 의로운 죽음에 시 한 수를 남겼다.  논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621년 어우당 유몽인이 쓴 '어우야담'이다. 다만 출생과 가계에 대한 내용이 없었으며, 후에 조정에서 논개의 공을 인정하여 의암(義巖)이란 시호를 내린 후 논개의 생애를 찾으며 밝혀진 내용이라 잘못된 내용이 많다는 얘기가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3일을 군민의 날로 삼아 논개제열고 문화행사를 하고 있다.

 

 

 

※교통편 : 대전 통영 고속국도-장수 IC-19번 도로-장수읍-논개사당

 

  

 

 

 

※주논개(朱論介. 1574-1593)

 

논개는 이름이요, 호는 의암(義巖) 본관은 신안 주 씨로 아버지는 훈장인 주달문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 씨로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에서 태어났다. 논개가 다섯 살 때 부친이 죽은 후 고난 끝에 갈 곳 없던 차에 장수현감인 최경회에 의탁하게 되었다가 17세 때 최경회 부실로 부부의 연을 맺었다. 19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우도 의병장이었던 최경회(모친이 돌아가시자 관직을 그만두었다가 의병을 모집함)의 뒷바라지를 하였고, 나중에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에서 싸우다가 최후를 마쳤다는 얘기를 들은 논개는 적장을 죽이기 위해 기생으로 변장하여 왜장을 의암으로 유인하여 20세 꽃다운 나이에 남강에 투신 순절한 것이다. 장수읍 두산리에 논개의 사당 의암사(義巖祠)가 있다.

 

 

 

 

 

              논 개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娥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논개사당 의암사 / 글씨는 부통령이었던 함태영이 썼고, 영정은 김은호 화백이 그렸다

 

 

 

1846년 장수현감이 세운 명비 / 촉석 의기 논개 장향수 명비 

 

 

의암사 사당 오르기 전 문에 쓴 현판 / 전라북도지사 황인성의 글씨

 

 

 

 

 

 

 

의암사 사당 입구 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