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터
장엄한 옛 영화가 묻힌 동방 제일 절터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회암리 (2009.7.11)
천보산 산행을 다녀오며 처음 보았던 회암사터는 경이로웠다. 사극에서나 들어보았던 최고의 사찰 회암사는 비록 빈터였지만 만여 평 절간 주춧돌과 남은 석재만 봐도 최고의 불교 본찰다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 동방 제일이요 중국에서도 이렇게 아름답고 큰 사찰이 없다 하였을 정도로 넓은 가람 규모에 압도된다.
세 번째 찾아가는 이번엔 더 가까이 가 보고 싶었다. 섬돌에 남아있는 태극문양, 갈기를 휘날리며 구름 위로 나는 천마 문양이 있는 주인 모르는 부도, 짝 잃은 당간지주, 송진을 놓고 밤을 밝혔을 정료대, 물을 담았던 큰 돌 물통, 정연하게 쌓은 석축과 계단의 모습이 장엄하였던 옛 영화를 읽게 한다. 주인을 알 수 없는 부도가 한 귀퉁이에 서있고 모두가 무너졌다. 머무름에 집착하지 않고 무너져 내림을 안타까워할 일은 없으며, 세월이 가면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작위적인 것은 안될 일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 하네. 이 아름다운 노랫말이 회암사를 일군 고려말 나옹선사의 선시다. 청산과 하늘을 벗하며 내가 애송하던 시다. 그런 나옹이 4년에 걸친 중창불사를 마치고 회향법회를 하는 날 회암사를 홀홀히 떠났다. 바람처럼 떠났다.
※ 회암사(檜岩寺)
고려 충숙왕 때(1328년) 인도의 스님 지공이 창건하고, 50여 년 뒤 나옹이 대가람으로 일군 절이 회암사이다. 태조 이성계는 왕사 무학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고, 자신도 왕에서 물러나 이곳에 있었다.있었다. 명종 때 문정왕후의 후원에 힘입은 보우가 불교중흥을 도모하였으나, 억불정책으로 보우는 잡혀서 죽고 절은 불탔다. 불상이 목이 잘리고 그릇은 한 군데 모아 부서진 점은 방화로 추정하고 있다. 그 뒤 1821년 부도와 부도비도 훼손되고 절터도 좁아졌다. 지금 절은 1828년 창건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회암사의 부속채 정도로 작고 아담하게 회암사터 800m 위에 1977년 지었다. 지공 나옹 무학의 부도와 비도 옮겨 관리하고 있다.
회암사터
주인을 알 수 없는 부도
당간지주 / 두쌍 중 하나는 짝을 잃었다.
새로 지은 회암사 / 뒤는 천보산
나옹선사(1320~1376) 부도와 석등
지공선사 부도와 석등
지공선사 비석과 거북 받침, 부도와 석등
무학대사(1327~1405) 묘비
무학대사 쌍사자석등(보물389호)과 부도(보물 388호)
무학대사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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