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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인열전 2 / 한국미술사 대표화가 8인 인생역전

향곡[鄕谷] 2010. 7. 31. 20:21

 

 

화인열전 2  / 유홍준 지음 (역사비평사)

한국미술사 대표화가 8인 인생역정

현재 심사정 / 능호관 이인상 / 호생관 최북 / 단원 김홍도

 

 

책을 구하고자 하였더니 화인열전은 이미 절판되고 없었다. 그래서 마음을 다시 먹었다. 세상의 책을 내가 다 가질 수는 없는 것이고, 책을 내 서재에 다 모을 수는 없는 것이니, 마음에 드는 책을 볼 수 있으면 되는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대신에 책 내용을 요약정리하여 두고 보기로 하였다. 

 

 

□ 현재 심사정 (玄齋 沈師正 1707~1769)

    - 문인화를 토착화한 고독한 선비화가 

 

 

 

현재 심사정 '딱따구리' (개인 소장)

 

영조시대 그림은 3재(齋)인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이 진경산수와 속화와 문인화를 이끌고, 훗날 3원(園)인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에 의해 화풍이 이어졌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심사정은 청송 심 씨 명문가였으나 증조부대에 과거시험 부정과 연이은 사화로 가문이 몰락한 선비로 한 달간 한 벼슬이 전부로 그림은 어릴 때 겸재에게 배웠다.〈딱따구리〉는 색채와 먹빛이 조화로운 맑은 서정의 명상적 분위기가 가득한 작품으로 한국 미술사에 기념비작으로 꼽힌다. 현재의 그림은 구도에 짜임새가 있고, 필치가 부드러우며 먹이 번지기에 깊은 맛이 살아나고, 필묵에 세련미가 있어 중국 남종문인화를 조선의 서정으로 토착화시켰다는 평을 듣는다. 60세에 그린〈파교심매도〉도 공간감과 먹빛이 살아난 명작으로 꼽힌다.

 

 

 

  파교심매도 / 매화꽃을 찾아 파교다리를 건너는

맹호연의 고사를 그린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현재의 그림은 그림에 서려있는 관념성의 정체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심화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그의 예술을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한다. 그는 현실 속에서 그림의 대상을 찾을 수 없어서 명화와 화보에서 자기 예술을 실현시키는 대상을 찾았다. 겸재의 진경산수를 현재의 남종 문인화 풍으로 재해석한 것이 단원의 산수화인데, 그의 회화적 성과에 대해 당대나 지금이나 소홀히 대접받고 있다는 저자의 평가이다. 

 

 

 

□ 능호관 이인상 (凌壺觀 李麟祥 1710~1760)   - 문인화에서 최고의 경지를 이룬 은일자의 선비화가

 

워낙 가난하여 친구들이 집을 사주고, '(삼신산의 하나인) 방호산을 능가하는 경관'이란 뜻으로 그의 호를 능호관으로 지었다. 집이 추워 매화를 겨울에는 남의 집에 맡겨 두었다가, 꽃망울을 터뜨릴 때 달려가 그림으로 사례하고 매화를 가져와 책으로 추위를 막아 관상하였다 한다.

 

그의 글과 그림은 문자기(文字氣)가 있는 예서법과 화법을 갖추었고, 고담하고 격조가 높아 추사도 올려 보았으며, 추사가 스승인 옹방관에게도 능호관의 그림을 선물로 보냈다. 그림 〈설송도〉는 그의 예술세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그림으로, 대담하게 윗줄기를 생략하여 긴장감이 돌고 꿋꿋한 기상에 청신하면서도 삼엄한 분위기가 감돈다는 평이다.

 

 

 

 설송도 / 눈 덮힌 낙락장송을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는 명화와 고화를 접하며 그림을 독학하였는데, 서얼 출신임에도 교류한 인사가 100여 명이 넘는 것은 인품과 뛰어난 학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실에 근거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벼슬에 잠시 나갔어도 고독과 비리에 대한 갈등에 힘들어 하여 수시로 은거코자 하였으나 가난하여 돈이 없었고 노친의 반대로 가지 못하였다. 

 

 

 

송하관폭도 / 맑은 필법으로 고고하고 초절 하다는 평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나중에는 은거처를 마련하였는데, 그 후 그의 그림은 은일자의 처연한 모습이 나타난다 하였다. 그림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는 가장 널리 알려진 명품이며 능호관의 개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능호관의 단짝인 이윤영은 '능호관은 봄 숲의 외로운 꽃이요, 가을밭의 선명한 백로'라 하였고, 허주 김재로가 평하기를 '능호관의 묘처는 담담한데(淡) 있으며 신선한(生) 맛에 있다 하였다.

 

 

 

 

□ 호생관 최북 (毫生館 崔北 1712~1786)

   - 붓으로 먹고 사는 풍류 畵師 칠칠이

 

호생관이란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란 뜻이니 천한 신분에 결연한 의지가 있고, 스스로 자(字)를 북(北)을 둘로 나눈 칠칠이라 하여 반항적인 기질이 있었다. 그럼에도 상류사회 인사와 교류가 많았는데 예술이 사대부 사회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는 메추리를 잘 그렸고, 산수를 잘 그려 기이한 멋이 있다 하였으나, 그런 평에 값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고 한다. 호생관의 일생의 명작이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인데, 왕유의 시에서 따온 화제를 붙였다. 그야말로 기이하게 빼어난 작품으로 친다.

 

 

 

공산무인도 / 호생관의 성격이 긍정적으로 나타난 선화의 경지에 이른 작품 (풍서헌 소장)

 

 

 

〈기우도(騎牛圖)도 소를 타고 내를 건너는 목동을 그렸는데, 소와 물살 묘사가 기이롭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최북은 자연풍경 묘사에 개성이 없었고, 문인화의 기품은 없었다는 평이다. 최북은 미천한 신분이어서 자기를 충분히 실현할 수 없었고, 천분을 못하는 분풀이를 세상에 퍼부으며 살았다. 그는 작가적 정서의 개입이 곧잘 누락되어 거장다운 면모를 상찬하는 논객을 찾을 수가 없었다.

 

 

 

 

□ 단원 김홍도 (檀園 金弘道 1745~1805?)

   -  여러 미술 쟝르를 모두 소화한 가장 조선적인 불세출의 화가 

 

단원 김홍도는 앞 시대 화가가 이룩한 겸재의 진경산수, 공재와 관아재의 속화, 현재와 능호관의 문인화를 소화한 가장 조선적인 불세출의 화가이다. 원래 무반에서 중인으로 전락한 집안이나 표암 강세황이란 훌륭한 스승을 만난 덕분에 단원이 화가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표암은 그런 단원을 무소불능(無所不能)의 신필(神筆)이라 하였다.

 

 

 

서당 / 회초리를 맞는 순간에 일어난 서당 분위기를 한 폭에 담은 걸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송하맹월도 / 표암이 소나무를 그리고, 단원이 호랑이를 그렸다 (호암미술관 소장) 

 

 

어린시절 도화서 화원이 된 단원은 속화인 〈서당〉등 명작을 남겼고, 표암과 합작으로 호랑이를 세필로 그린〈송호도〉가 있고, 29세에 영조 초상을 제작하는 어용 화가로 뽑혔고 〈규장각도〉를 그렸고,〈군선도〉란 대작을 남겨 기량을 보여주었다.  단원은 외모가 빼어났고 풍채가 뛰어나게 점잖은 데다, 정조어진을 그리는 등 실력도 갖추어 어진 제작 후 안기 찰방으로 제수되었다. 안동 풍산에 있는 체화정 정자에 가면 담락제(湛樂齋)란 그의 글씨가 남아있다.

 

 

 

 

군선도 / 30대 단원이 화명을 날린 대작 (호암미술관 소장)  

 

 

그는 30대에 신선도와 속화로 유명했다면, 40대에는 화조화였다. 그 밖에도 기록화나 산수화 등 요청이 있는 곳에서는 몸을 아끼지 않고 그렸다. 어명을 받아 그린 정조어진과 금강산도 등은 전쟁으로 모두 소실되어 볼 수가 없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기록화의 금자탑이며, 〈을묘년 화첩 중 촉석정도〉는 진경산수의 기념비적 명작이다. 〈삼공불환도〉는 산수화로서 최대작으로 단원의 화풍을 집대성한 만년의 노작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중 행렬도 / 조선시대 기록화의 기념비적 명작 (호암미술관 소장) 

 

 

단원은 정조 사후 어느 시골에서 권농으로 초야에서 지내며 만년을 어렵게 보냈다. 단원의 작품 중 낙관이 단노(檀老) 단옹(檀翁) 단구(檀邱)로 표시한 것은 50대 후반 작품이다. 단원 작품은 어느 것 하나 명작 아닌 것이 없고 멋과 격조가 살아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단원 작품에 가짜는 있어도 타자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모두가 좋아하는 화가였다. 가진 재주가 있는 데다가 사물을 인식하는 감성적 능력이 뛰어났고, 작가적 상상력에 기초하여 재창조하는 구성력이 탁월하고, 그의 천재성을 남들과 나누고 같이 하며 양식을 창출하는데 능력을 발휘한 불세출의 화가였다.

 

 

 

 

삼공불환도 / 1801년(57세) 단원의 화풍을 집대성한 말년의 노작 (호암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