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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평전 1 / 완당 김정희에 대한 삶과 학문과 예술에 대한 접근

향곡[鄕谷] 2010. 8. 7. 08:28

 

 

 

완당평전 1 / 유홍준 지음 (학고재. 408면)

완당 김정희에 대한 삶과 학문과 예술에 대한 접근

 

 

 

 

 

 

 판전 / 추사가 죽기 3일 전 쓴 글씨로 고졸한 가운데 무심의 경지를 보여주는 명작 (봉은사 소재) 

 

 

 

 

추사 김정희 (1786~1856)

 

 

추사 김정희는 최고의 서예가이고, 금석학과 고증학에서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고, 학문은 경학 중 주역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불교의 선지식이 높았으며, 문인화의 대가였기에 접근하기 힘든 산이었다. 완당이 경학의 대가인 것은 일본인 학자 후지츠카가 밝혔다. 세상에서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하였다. 추사를 함부로 논하기 힘든 이유는 추사의 글씨인 추사체가 어렵다는데서 시작한다.

 

 

 

 

완당 그림 불이선란도

 

 

증조부가 영조의 사위로 경주 김 씨 월성 위이고, 아버지는 판서를, 어머니 집안도 기계 유 씨 집안으로 문장과 글씨로 내로라하는 등 53개 군현에서 추렴하여 추사 고택인 집을 지을 정도로 대단하였다. 묘비문에 풍채와 도량은 뛰어나다 했으나 의리(義利)나 이욕(利慾)을 다투는데 창끝 같아서 막을 자가 없다 하였으니 실상은 더했으리라는 짐작이다. 호는 처음에는 추사(秋史)라 하였으나, 연경에 가서 나중에 사제관계로 모신 완원에게 완당(阮堂)이란 호를 받아 한창 때는 완당을 쓰게 되었다.

 

 실학은 중국과는 관계없이 자생적으로 일어난 학문의 신동향이었는데,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에 이어 김정희가 토착화 하였다. 스승 박제가를 만난 것도 인연이었지만 박제가의 도움으로 연경에서 옹방강완원을 만난 것이  완당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수시로 방대한 자료와 귀중한 책을 얻었고 사제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30이 되던 해 북한산 비봉에 있던 비가 진흥왕순수비 임을 밝혔고, 경주 무장사 비를 통해 왕희지체 연구에 필수불가결한 명비를 발견하였다. 지금은 소실된 남한산성 이위정 현판, 묻혀버린 옥인동 '松石園' 바위글씨를 썼고,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은 30대에 쓴 최고의 해서 작품이다. 대체로 40 중년까지 완당의 글씨는 매우 매끄럽고 윤기가 나는 글씨이고, 중년에 들어서서 글씨에 서려있는 자신감과 웅장한 필치에서 대가의 기개가 흘렀다는 평가다. 

 

완당은 신분에 대하여 매우 개방적이었고 진보적이었다 그가 중시하는 것은 신분이 아니라 사람의 능력과 노력이었다. 완당의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가면서 중국 학예인들과 교유가 더 늘었고 완당의 글을 구하고자 서신을 통해 친교를 원하는 일은 만년까지 계속되었다. 청으로 가는 편이 있으면 문물교류를 계속하여, 청나라 경학을 집대성한 '황청경해'(180여종 1400여 책)을 몇 년에 걸쳐 입수하기도 하였다.

 

 

 

 

침계 / 완당이 함경감사로 자신을 돌봐준 후배이자 제자인 침계 윤정현을 위해 써준 글씨 

 

 

 

완당은 중년에도 금석연구를 계속하여 주위 인사가 외직에 나가면 그곳의 중요한 탁본을 무수히 부탁하였다. 경주 남산 창림사터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앞부분을 발견하였고, 벗 권돈인이 함경감사로 나갈 때 황초령 진흥왕순수비를 찾도록 하여 재발견하게 하였다.  청나라 서예에 대한 정보에 정통하여 소견을 자신 있게 말하였고, 국내에서도 그러하였다. 이광사가 쓴 글씨에 대해서는 혹독하였고 독불장군식 비판을 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아끼는 제자에 대해서는 엄청 아꼈다. 이언적은 학식과 시문에 능통한 역관인데, 중국을 12번 다녀오면서 완당이 귀양살이 중에 연경에서 제주까지 수 차례 수백권의 책을 구해주어 나중에 답례로 세한도를 그려준 것은 다 아는 일이다. 그림 제자 중에는 소치 허련을 아꼈다. 소치도 완당이 제주 유배 중 세 번이나 찾아갔다. 초의선사도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하는 사이였다.

 

 

 

  

 

 

명선 / 초의선사가 완당에게 좋은 차를 보내는 답례로 보낸 글씨

 

 

 

 

 

 

간찰 / 유배지 제주에서는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

 

 

 

10년 전 벌어졌던 부친 김노경에 대한 옥사를 이번에는 재론하여  부친, 완당, 동생의 관직이 삭탈되고 죽을 처지에 있던 왕당을 벗 조인영이 구하여 겨우 제주 대정현에 위리안치로 그치게 하였다. 유배지에는 반찬, 음식, 옷을 나르느라 수시로 하인들이 들락거렸다. 음식과 병으로 힘들어한 완당의 유배는 9년만에 풀렸으나 그동안 병중인 아내가 죽었다. 이상적에게 준 '세한도'는 실제 그러한 소나무와 집은 없다고 한다. 실경산수로 치자면 이 그림은 0점짜리 그림이라는 저자의 평이다. 세한도는 완당의 마음속 이미지를 그린 것으로, 그림에 서려있는 격조와 문기(文氣)가 생명이다. 이 그림이 우리를 감격시키는 것은 그림 자체보다는 그림에 붙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 발문과 소산한 그림의 어울림에 있다. 세한도는 이상적 사후에 전전하다가 일인 후시츠카 손에 넘어갔다. 나중에 서예가 손재형이 몇 달을 찾아가 보상 없이 되돌려 받았는데,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기 위해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 맡겼다가 갚을 수 없자 사채업자는 미술품 수장가에게 팔았고, 지금은 그 아들 손창근이 소장하고 있다.

 

                                    

 

         

세한도 / 유배시절 연경에서 제주까지 수 차례 수 백 권의 책을 날라다 준 제자 이상적을 위해 그린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