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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평전 2 / 완당 김정희에 대한 삶과 학문과 예술에 대한 접근

향곡[鄕谷] 2010. 8. 13. 19:35

 

 

완당평전 2 / 유홍준 지음 (학고재. 408면)

완당 김정희에 대한 삶과 학문과 예술에 대한 접근

 

 

 

제주에 유배 중에도 글씨 부탁을 받은 완당은 종이도 없고, 내용 검증도 해야 하고, 눈이 침침하고 건강이 나빠져서 어려움이 있었으나 다 들어주려 하였다. 그러면서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라 하였다. 그는 지필묵이 맞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았다. 완당은 70 평생 벼루 10개를 밑창 내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할 만큼 열정적이었다. 제주 유배시절 세월이 갈수록 추사체의 면모를 갖추어 가고 금석기가 살아나고 있었다. 완당의 예술세계는 '제주도 유배지에서 피어난 꽃'이라는 견해가 완당시절부터 있었다.

 

 

 

 

 단연 죽로 시옥 (端硯 竹爐 詩屋) / 완당이 전서와 예서를 섞어 쓴 명작으로, 유명한 단계 벼루, 차 끓이는

대나무 화로, 그리고 시를 지을 수 있는 작은 집이면 만족하겠다는 선비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9년 제주 유배를 끝내고 돌아오면서 대둔사에 들러 자신의 글을 떼어내고 다시 이광사의 글을 달게 하였으며, 창암 이상만의 글씨를 모질게 비판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기 위해 전주에 찾아갔으나 창암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창암은 말하길 완당은 조선붓의 거친 듯 천연스러운 맛을 모른다 하였다. 완당은 해배 후 3년을 보내다가 북청 유배 1년, 그리고 마지막 4년을 더 살다가 71세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유배 후 노호(지금의 용산부근)에 살면서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신품의 경지인 〈불이선란(不二禪蘭)〉, 완당 행서의 명작인〈석노 시〉등을 남겼다. 그밖에 영천 은해사, 다산초당 등에 남긴 명작이 수두룩하다.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 낡은 책,무뚝뚝한 돌이 있는 집이란 뜻

추사체의 멋과 개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명작 

 

 

 

추사체의 특질은 괴(怪)라 얘기한다. 서법에 충실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글씨,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괴이하나 본질을 대면 울림이 있는 글씨, 그것이 추사체이다. 완당은 문자향이나 서권기를 가슴에 새기려면 인품과 학식을 높힐수 있도록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고 하였다.

 

 

 

 

 

진흥북수고경 /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를 보호하는 비각 현판

 

 

 

 

 

노안당(老安堂) / 완당이 석파 이하응에게 써준 현판. 운현궁 소재

 

 

 

 

헌종이 승하하자 벗 권돈인과 함께 정쟁에 휘말려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마침 후배이자 제자인 윤정현이 함경감사로 부임하자 황초령비를 마저 찾고 비각을 세우도록 한다. 윤정현에게 써준〈침계(枕溪)〉는 명작 중 명작이며,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예서체 현판은 장쾌한 기상과 대담한 글자의 변형을 보여준다. 1년만에 북청 유배에서 돌아온 완당은 과천에서 살았는데, 그를 가장 기다린 석파 이하응의 난그림은 스승 완당을 넘어서게 된다. 운현궁에 있는 현판 〈노안당(老安堂)〉은 완당이 석파를 위해 써준 노년 명작 중 하나이다.

 

완당은 시와 글씨 같은 예술이 아니라 금석학 고증학에서 더 뛰어났다. 완당이 생각하는 감식은 금강역사 같은 눈(金剛眼)과 혹독한 세무관리와 같은 손끝(酷吏手)과 같아야 가려낼 수 있다 하였다. 그의 안목은 오경석에게 전수되었는데,서화연구는 그의 아들 오세창에게 전수되어 간송 전형필의 고서화를 감정하여 간송미술관을 빛내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산숭해심(山崇海深)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는 뜻으로 스승 옹방강이 실사구시의 뜻을 풀이한 글에 나오는 문구이다.

유천희해(遊天戱海) / 하늘에서 노닐고 바다에서 노닌다는 뜻으로 양 무제가 종오라는 사람의 글을 평하는 말이다.

완당의 기념비적 명작으로 완당의 기괴한 글씨가 얼마나 웅혼한 기상으로 넘치는가를 보여주는 글씨이다.

 

 

 

 

 

계산 무진(溪山無盡) / 구성 자체가 파괴적이고 대담한 명작이다.

'계산은 끝이 없네'란 뜻으로 계산 김수근을 위해 써준 글씨이다

 

 

 

 

과천 시절 완당은 비로소 자신이 스스로 허물을 벗었다고 하였는데, 그 경지를 잘되고 못되고 가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졸(拙)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완당 글씨의 본질은 '괴'와 '졸'의 만남이다. 그 대표 명작이 〈산숭해심(山崇海深)〉이란 글자인데 완당의 위치를 가리키는 수준이기도 하다. 글씨를 쓰기 어려운 지경까지 글씨를 쓰던 완당은 봉은사 현판 〈판전(板殿)〉을 쓰고 3일 뒤 세상을 떠나 추사고택 옆 선산에 묻혔다. 판전은 추사체의 졸(拙)함이 극치에 달한 글씨로 졸한 것의 힘과 멋이 천연스럽게 살아있다. 완당 사후 경주김씨 월성 위 집안은 몰락하고 3형제 모두 아들이 없어 대가 끊겼다. 벗과 제자들은 흩어진 시원고 편지들을 모아 책을 내고 완당집으로 펴내어(1868년) 이것이 이후 완당 연구의 기본이 되었다.

 

 

 

화법유장강만리(畵法有長江萬里) / 그림 그리는 법에는 양자강 일만 리가 다 들어 있고

서세 여고 송일지(書勢如孤松一枝)

완당의 글씨 중  글자 구성에 멋이 한껏 들어있는 명품으로 예술의 정신성을 비유한 글이다  

 

 

 

 

대팽두부 / 최고 가는 반찬이란 두부나 오이와 생강과 나물. 최고 가는 훌륭한 모임이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

글 내용과 글씨 모두가 완당 예술이 평범성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최말년의 대련이다.

잘 쓰겠다는 의지를 갖지도 않은 상태에서 절로 드러난 무심의 명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