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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곡 산 방 ( 鄕 谷 山 房 )

글곳간/산시(山詩)

이원규 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향곡[鄕谷] 2014. 8. 11. 08:25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꽃 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으로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시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마시라

 

 

 

 

 

 

천왕봉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능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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