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향 글향이 있는 산방

산을 걷고 길을 걸으며 세상을 배웁니다

향 곡 산 방 ( 鄕 谷 山 房 )

역사와 문화가 있는 풍경/세월 속으로

체 / 가루를 치거나, 액체를 거르거나, 말을 거르거나

향곡[鄕谷] 2018. 6. 20. 08:27

 

 

 

 

가루를 치거나, 액체를 거르거나, 말을 거르거나

 

 

 

 

 

 

 

체는 빻아놓은 곡식의 가루를 치거나, 액체가 있는 것을 짜내어 거르는 도구이다.  기계식 방앗간이 있기 전에는 수확한 곡물의 양이 많으면 소가 끄는 연자방아나 사람이 디디는 디딜방아로 찧고 바수었다. 두부콩이나 옥수수 등은 맷돌로 돌려서 썼고, 곡물을 소량으로 찧거나 잘게 바숫는 데는 절구를 썼다. 그렇게 돌리고 찧고 바수어 나온 것을 더 곱게 치거나 거른 것이 체였다.

 

체는 나무를 얇게 켜서 두 개의 바퀴를 만들고 그 사이에 말총, 철사나 나이론을 끼워서 바닥을 만들었다. 둘러 싼 바퀴가 쳇바퀴이고, 바닥을 쳇불이라 하는데, 쳇불 구멍은 크기에 따라 용도가 다르다. 굵은 것은 떡고물이나 메밀가루 등을 치는데 쓰고, 가는 것은 술을 거르는데 썼다. 우리 음식은 정말 손이 많이 간다. 그렇게 찧고 바수어 음식을 준비하니 말이다. 지금은 절구로 하는 것도 있지만 분쇄기나 믹서기로 돌려서 음식을 한다. 아무래도 기계로 돌려서 만든 음식과 체로 걸러서 하는 음식 맛의 차이가 있을 듯 싶다.

 

법정스님의 사유 노트와 미발표 원고를 엮은 책 '간다, 봐라'에 이런 글이 나온다. '침묵은 세월의 체다. 침묵 속에서 걸러지고 남은 알맹이만 진짜다. 한때 들뜬 마음으로 좋아했던 사람이나 물건도 침묵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알맹이와 껍질이 가려진다'. 같은 책에 이런 글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고자질을 하려고 달려왔던 이웃 사람의 말을 끊고서, 진실의 체, 친절의 체, 필연성의 체로 거른 것인지를 물었다. 진실한 것이 아니고, 친절한 말도 아니고, 필요한 말이 아니면 묻어버리라고 했다.

 

이와 같이 체는 곡물을 곱게 만드는 용구의 기능도 있지만,  세월 속의 일을 침묵이란 체로 알맹이와 껍질로 거르거나, 바르지 못한 일이나 말을 거르는 순화의 역할도 한다. 아쉽게도 이 도구가 우리로부터 차츰 멀어지고 있다. 

 

 

 

체 / 북평장에서 (2016.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