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황식물
배고픔에 찾았던 먹을거리
조선시대에는 2~3년에 한 번씩 기근이 들 정도로 흉년이 잦았다. 질병과 흉년이 같이 찾아와 어려움이 말도 못했다는 것은 역사책에서 많이 읽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구황이란 말은 980여 번 나온다. 산천을 다 헤매어 구황식물을 찾았다. 구황(救荒)이란 농사는 안 되어 거친 땅에서 먹을 것을 찾는 일이다. 일제 때에도 만주에서 들여온 콩깻묵과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주린 배를 채우는 일이 많았다. 그런 구황식물이 몇 가지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와중에 목숨을 이을 풀이 천 개란 뜻인 구황천초(救況千草)란 말이 있는데, 실제 용도로 쓸 수 있는 것이 백여 가지 된다고 한다.
배고픔에 찾았던 구황식물은 잎이나 싹, 줄기를 먹는 식물, 껍질이나 뿌리를 먹는 식물, 씨나 열매를 먹는 식물, 꽃을 먹는 식물들이 있다. 이런저런 식물을 찾아 산천을 헤매었다. 제일 많이 찾은 것이 참나무과인 상수리와 굴참나무 열매인 도토리다. 묵으로 쑤어 배고픔을 해결했는데, 도토리묵은 설사 환자에게도 좋으니 당연히 단골 메뉴였다. 칡은 국수를 해 먹었고, 곤드레는 배고픈 화전민이 구한 구황식물이었다. 곤드레에 대한 가사는 정선아리랑에도 나온다. 쑥잎, 솔잎, 뽕잎도 있지만 팽나무 잎, 느릅나무잎, 느티나무잎도 있고, 대추나무 복숭아나무 잎도 먹었을 만큼 어려움이 컸다. 뿌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곡의 뿌리는 물론 둥굴레, 마, 백합. 관중까지 찾았으니 말이다. 열매는 도토리도 있지만, 밤, 개암, 산사, 으름, 머루, 다래가 있고, 조릿대 열매까지도 찾아서 떡으로 해 먹었다. 꽃으로는 메밀꽃, 감국, 율무 등이 있다.
감자나 고구마가 있었으면 나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구마는 1763년(영조 39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조엄이 가져와 19세기 초에 많이 재배하였고, 감자는 1824년 인삼을 캐던 청나라 사람에 의해 들여와 곧바로 전국에 퍼지기는 했지만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해방 후 배급용 옥수수와 고구마로 배고픔을 견뎠지만 결정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은 다수확 통일벼였다. 요즈음 세계적인 기근을 해결하는 것은 옥수수이다. 수확량도 많지만 보관이 쉽기 때문이다. 여전히 한쪽에선 식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