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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곡 산 방 ( 鄕 谷 山 房 )

자연의 향기/자연의 말

초근목피(草根木皮) /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끼니를 잇다

향곡[鄕谷] 2024. 8. 16. 09:14

말속에 자연 15

 

초근목피(草根木皮)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끼니를 잇다

 

 

 

임진왜란(1592~1598) 전쟁의 소용돌이를 벗어난 20여 년 후 조선은 다시 재난의 시대였다. 17세기 무렵 지구는 평균기온이 낮아지며 자연재해가 몰아쳤다. 조선에서도 1620년에서 1720년 사이에  우박, 가뭄, 지진의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흉년이 들어 가히 어려운 시기였다. 특히 1670년(경술년), 1671년(신해년)에 일어난 '경신대기근'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대재앙이었다. 2년 동안 기근으로 백성들은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전염병으로 죽었다. 백성들은 풀뿌리와 나무껍질(草根木皮. 초근목피)로 연명하였다. 당시 상소문에 따르면 2년 동안 기근으로 굶어 죽은 사망자 수는 100만 명이라 하였다. 백성을 구하겠다고 자진하여 지방으로 내려간 목민관은 구휼을 하다가 죽기도 하였다. 전쟁과 대기근으로 나라의 살림은 거덜 났다. 

 

구황(救荒) 제도는 국가가 예비곡식을 준비하였다가 재해가 일어나고 곡식이 여물지 않을 때 백성들을 배곯지 않게 제공하는 것이다. 세종 때 지은 구황서(救荒書)로 구황벽곡방(救荒僻穀方)이 있었고, 명종 때 간행한 충주구황촬요(忠州救荒撮要. 1541년)가 있고, 세종 때 구황서를 참고로 명종 때 지은 구황촬요(救荒撮要. 1544년)가 있다. 그 외에도 여러 서적이 있었다. 현존 가장 오래된 구황서는 충주구황촬요이다. 그래서 구황(救荒)에서 해결을 도모한 촬요(撮要 : 요점을 취함)의 내용을 찾아보았다. 첫째는 절식(節食)을 하라는 것이다. 죽을 쑤어 먹고, 풀을 섞어 먹고, 한 끼는 건너뛰는 것이다. 둘째로는 귀신에 대한 제사와 불공 음식을 금지하고. 셋째는 식량이 없다고 유리걸식하지 않는다. 넷째는 구휼을 하고 흉년 대비 비축을 한다. 다섯째는 장(醬)으로 부종 예방과 기력을 유지한다. 여섯째는 묵은땅을 개간하고 농우, 유랑민, 노비, 도둑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구황에 닥쳤을 때 대처할 몇 가지 식물을 제시하였다. 먼저 솔잎가루를 만들어 솔잎죽을 먹도록 했다. 솔잎죽은 배는 부르나 변비가 생기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날콩을 씹어 삼키고 느릅나무껍질을 씹도록 했다. 그런데 날콩이 어디 있겠는가.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표현은 솔잎죽을 먹고 변비가 생겨서 나온 말이었다. 청송지역에서는 소나무껍질로 만든 송기떡을 만들기도 했다. 다른 구황식물로는 도라지를 삶아 밥에 넣어 먹는 방법, 메밀 어린 줄기를 볶아 미숫가루를 만드는 방법, 칡뿌리를 가루로 만들어 쌀에 넣어 죽을 만드는 방법, 삽주뿌리를 캐 먹는 방법, 냉이죽을 쑤어 먹는 방법, 느릅나무껍질로 죽과 떡을 만드는 것, 무를 구워 먹는 것, 하수오뿌리와 연근을 쪄 먹는 방법, 토란을 달여 마시는 방법, 더덕과 도라지 뿌리를 말려서 먹는 방법, 마를 캐서 면을 만드는 방법, 메밀줄기 콩잎 콩깍지로 버무리를 만드는 방법 등이 있다.

 

몸이 불편한 사람을 위해서는 부종에는 붉나무껍질을 물에 끓여 죽을 먹고. 오장을 편하게 하고 열을 없애려면 송진을 먹게 했다. 많이 굶은 사람은 너무 배불리 먹거나 뜨거운 것을 많이 먹으면 안 되니, 장국물을 타서 마시게 한 다음에 죽을 차갑게 해서 먹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중에 소나무 이용법을 다양하게 제시하였다. 솔잎죽 외에 솔순, 소나무껍질, 송홧가루 등을 이용하고, 솔잎을 썰어 국수로 만드는 방법도 제시하였다. 백성들은 들과 산으로 다니며 도토리나 초근목피를 구하느라 산하는 황폐화되었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그런 조짐은 있었다. 그래서 구황서가 계속 등장했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는데 권문세가들은 개간한 간척지를 사유화하여 독차지하고 백성들 몫은 없었다. 그러면서 세수를 거두기 바빴고, 관리들은 부패하였다. 양반들은 전쟁이 났을 때에도 지원을 외면하였다. 명종 때 임꺽정이 도적으로 활동하였다. 임꺽정에 대하여 명종실록에는 '도둑이 생겨남은 가렴주구 탓이요, 정치가 바로 서지 못한 탓'이라 기록하였다. 실제 큰 도둑은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정치가들이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옥수수가 전래되었다. 경신대기근 무렵에는 널리 재배하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고구마는 영조 39년(1763년) 조엄이 일본 사신으로 다녀오며 쓰시마(대마도)에서 종자를 가지고 왔다. 감자는 1824년 청나라에서 관북지방으로 들어온 것으로 전한다. 백성들이 대기근을 겪을 때 없었던 작물들로 남미원산 식물들이다. 백성의 먹을거리를 해결하고 편안하게 살게 하는 것이 나라 살림의 근간이다. 초근목피란 말을 하면 가슴 아픈 얘기만 하게 된다

 

 

 

껍질이 벗겨진 소나무 / 주왕산 (경북 청송. 2014.6.7)

 

 

솔잎 / 남한산 (경기도 광주. 2024.7.12)

 

 

느릅나무 껍질 / 한강 잠실지구 (2019.6.12)

 

 

도라지 / 경북 영주 (2013.9.7)

 

 

칡뿌리 / 용문장 (경기도 양평. 2020.2.20)

 

 

삽주 / 백아도 (인천 옹진. 2023.5.31)

 

 

마 / 봉암성 (경기도 광주. 2021.10.5)

 

 

더덕 / 귀목봉 (경기도 가평 . 2006.8)

 

 

붉나무 / 송이도 (전남 영광. 2022.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