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도 2
교동 향교
지방 유형문화재 제28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2014.3.27. 맑은 후 흐림)
월선포 선착장에서 왼쪽에 있는 산 쪽으로 들면 바닷길로 먼저 시작하고, 도로 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돌아 개화산으로 먼저 가는 길이 된다. 오른쪽으로 길을 잡았다. 갯버들이 움을 틔우고 농부는 논일을 하느라 길이 논흙으로 덕지덕지 덮였다. 산자락 아래는 탄흔으로 패인 묘비가 하나 서 있다. 산소의 주인은 가선대부 벼슬을 지낸 분이다. 산소는 보살피는 이가 없는지 중간이 허물어졌다. 조선 말에 가선대부는 양산한 벼슬이었다지만 그래도 벼슬인데 후손이 끊어졌는 모양이다.
산길을 돌아나오면 교동 향교이다. 서원이 학문 연구와 특정 성현의 제향을 위해 설립한 사설 교육기관이라면, 유학 성현을 모시어 제사를 지내는 기능을 하였다. 교동 향교는 고려 충렬왕 때 (1286년) 안유선생(본명은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공자와 10철(十哲)의 초상을 모셔와 우리나라 처음으로 화개산 문묘에 모셨다가 송도에 다시 모셨다. 그래서 교동향교를 수묘(首廟)라 한다.
관리인의 안내를 받아 공자의 위패를 모신 전각인 대성전에 들어섰다. 당나라 현종이 공자에 내린 시호인 문선왕(文宣王)의 위패가 초상 아래 자리 잡고, 좌우로 중국의 성현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었다. 대성전 마당 앞에는 학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인 명륜당이 자리 잡았다. 서무,동제,외삼문,내삼문 등 건물들은 고졸하다. 향교를 관리하는 정성이 곳곳에 배어 있다. 이곳에서도 학동들이 배움의 숨결이 넘쳤을 것이다. 배움은 앞으로 나아가는 사다리이다. 잠이 오면 향교 밖 우물에서 목을 축이며 배우고 또 익혔을 것이다.
이 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야 개화산으로 드는 길이다
바다 건너 석모도가 가깝다
교동 향교 외삼문
노룡암조선 숙종 때 이봉상이 노룡암이라고 1717년에 3자를 짓고, 그의 손자 달해가 1773년 그 글씨를 새겼다. 순조 때(1820년)는 통어사 이규서가 '호거암 장군이 풍기를 깨끗이 하였다'는 뜻으로 7자 글씨를 새겼다.
내삼문
대성전
공자 위패를 모신 대성전
좌우로 성현들의 위패를 모셨다
정면에서 본 대성전
명륜당
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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