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완영의 시조
깊고도 절절한 시
여름이 끝나는 2016.8.27. 한국 시조의 큰 울림 정완영 시인(1919~2016)이 돌아가셨다.
그의 시조 '여름이 떠나고 말면'에서 '여름도 떠나고 말면 쓸쓸해서 나 어쩔꼬' 하시더니,
여름이 막 끝나는 즈음에 가셨다. 그가 지은 시조 '조국', '고향생각', '들녘에 서서',
'애모', '추청(秋晴)', '산이 날 따라와서', '가을앓이' 등 선(禪)에 드신 듯 펼쳐내는 가락이
우리의 정서에 절절히 와 닿는다. 그의 시조를 읽으면 깊고도 애절하여 푹 빠지고 만다.
조국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애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 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 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처럼만 여위느냐.
고행생각
쓰르라미 매운 울음이 다 흘러간 극락산(極樂山) 위,
내 고향 하늘 빛은 열무김치 서러운 맛,
지금도 등 뒤에 걸려 사윌 줄을 모르네.
동구(洞口) 밖 키 큰 장승 십리(十里) 벌을 다스리고,
푸수풀 깊은 골에 시절 잊은 물레방아,
추풍령(秋風嶺) 드리운 낙조(落照)에 한 폭(幅) 그림이던 곳.
소년(少年)은 풀빛을 끌고 세월(歲月) 속을 갔건만은,
버들피리 언덕 위에 두고 온 마음 하나,
올해도 차마 못 잊어 봄을 울고 갔드란다.
오솔길 갑사댕기 서러워도 달은 뜨네,
꽃가마 울고 넘는 성황당 제철이면,
생각다 생각다 못해 물이 들던 도라지꽃.
가난도 길이들면 양(羊)처럼 어질더라,
어머님 곱게 나순 물레줄에 피가 감겨,
청산(靑山) 속 감감히 묻혀 등불처럼 가신 사랑.
뿌리고 거두어도 가시잖은 억만 시름,
고래등 같은 집도 다락 같은 소도 없이,
아버님 탄식을 위해 먼 들녘은 비었더라.
빙그르르 돌고 보면 인생(人生)은 회전목마(回轉木馬),
한 목청 뻐꾸기에 고개 돌린 외사슴아,
내 죽어 내 묻힐 땅이 구름 밖에 저문다.

해가 뜨는 아침 / 경북 영주 무실마을 [사진 박상국]
山이 날 따라와서
동화사(洞華寺) 갔다 오는 길에 山이 날 따라와서
도랑물만한 피로를 이끌고 들어선 茶집
따끈히 끓여 주는 茶가 단풍(丹楓)처럼 곱고 밝다.
산이 좋아 눈을 감으니 부처님 그 무량감(無量感)
머리에 서리를 헤며 귀로 외는 풍악(楓岳)소리여
어스름 앉은 황혼(黃昏)도 허전한 정 좋아라.
친구여, 우리 손 들어 작별(作別)하는 이 하루도
천지(天地)가 짓는 일들의 풀잎만한 몸짓 아닌가
다음날 설청(雪晴)의 은령(銀嶺)을 다시 뵈려 또 옵세나.
추청(秋晴)
필시 무슨 언약이 있기라도 한가부다
산자락 강자락들이 비단 필을 서로 펼쳐
서로들 눈이 부시어 눈 못 뜨고 섰나부다.
산 너머 어느 산마을 그 언덕 너머 어느 分校
그 마을 잔치 같은 운동회 날 갈채 같은
그 무슨 자지러진 일 세상에는 있나부다.
필생을 편지 한 장을 써본 일이 없다던 너
꽃씨 같은 사연을 받아 봉지 지어 온 걸 봐도
천지에 귓속 이야기 저자라도 섰나부다.

아름다운 산하 / 경기도 양평 백운봉에서 (2008.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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