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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과 봉암성 / 역사를 배우는 산성길

향곡[鄕谷] 2017. 3. 7. 11:14

 

남한산성 13

 

남한산성과 봉암성

역사를 배우는 산성길

 

지화문(남문)-남장대터-좌익문(동문)-장경사-동장대터-봉암성 외동장대터-전승문(북문)-북장대터-우익문(서문)-서 암문-수어장대-지화문(남문)

이동거리 10.4㎞. 이동시간 4시간 32분. 휴식시간 1시간 10분. 계 5시간42분. (2017.3.6)

 

 

전날이 경칩이었지만 산성에는 아직 잔설이 남아 있었다. 남한산성과 외성인 봉암성을 한 바퀴 돌았다. 남한산성만 돌면 8㎞지만 봉암성까지 이어서 돌아오니 10.4㎞이다. 백제 온조왕이 산성을 쌓고 남한산성이라 불렀다. 신라 때는 문무왕이, 조선시대에는 선조 때 개축하였다. 인조 때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 뒤에 대대적으로 개축한 것이 오늘의 남한산성이다. 그 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새로 단장하였다.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한 뒤 정묘호란(1627년)이 일어났고, 이어서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났다. 봉화로 적의 침입을 알리던 시기에 봉화의 연결이 안 되어 열흘이 더 지난 뒤 적의 침입을 알았으니 체계는 허약하였다. 상시 군사체제가 아니던 시기였으니 나라를 지킬 준비는 부족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었으면서도 양반들은 국방과 조세의 의무를 지지 않았고, 나라의 살림만 거덜내고 양반임네 하였다. 백성들의 허리는 휘고 고초는 격심하였다. 강화로 가는 길은 막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일도 허둥대었다. 주화파와 척화파의 논쟁은 모두 나라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힘 없는 나라의 형상이다.    

 

버스를 타고 올라가 출발은 남문인 지화문(至和門)에서 하였다. 정조대왕이 화평을 지향한다고 지은 이름이다. 잦은 국난을 막자는 임금의 의지일 것이다. 성 남쪽 흙길은 따스하고 부드럽다. 남장대터 부근은 성곽과 어울어져 아름다운 성곽길이다. 남한산성의 가장 높은 곳 동장대터를 지나 봉암성으로 건너가는 길은 아직 빙판이었다. 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쌓은 성곽은 몇 년도 안되어 많은 데가 허물 어져 보수중이고 비닐로 덮어두었다. 차라리 허물어진 채로 있는 봉암성이 더 아름답다.

 

남한산성 성곽은 승려들을 동원하여 쌓았다. 남한산성 안에 절이 많았던 이유가 그들을 동원하여 성곽을 지을 때 숙식을 하기 위해서였다. 동쪽과 북쪽은 성 밖이 빙판이라 성 안으로 걸었는데, 서문쪽도 정도는 덜하지만 빙판과 질퍽한 흙길이 번갈아 있었다. 서장대인 수어장대로 갔다. 옆에 세운 누각에는 효종이 된 봉림대군 시절 겪었던 치욕을 잊지 말자고 영조 때 쓴 무망루(無忘樓) 현판이 있다.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뜻은 지금도 늘 유효하다.

 

  

※ 교통편

 (갈 때)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에서 200m 신흥주공아파트앞 정거장에서 9번,52번 버스를 타고 산성터널앞(남한산성 종점 한 정거장 전)에서 하차

(올 때) 산성 주차장에서 출발하는 9번,52번 버스 이용 산성역 하차

 

 

 

지화문(남문)

 

 

 

 

남장대지

 

 

 

 

 

 

동장대지에서 봉암성 가는 길

 

 

봉암성

 

 

봉암성

 

 

봉암성

 

 

봉암성

 

 

전승문(북문)

 

 

좌익문(서문) . 인조가 항복하러 삼전도로 나갔던 문

 

 

수어장대 암문

 

 

무망루 편액

 

 

수어장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