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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곡 산 방 ( 鄕 谷 山 房 )

글곳간/시(詩) 산책

조오현의 시 '아득한 성자' 외

향곡[鄕谷] 2018. 5. 28. 13:23

 

 

 

조오현의 시 '아득한 성자' 외

 

 

조오현시인이 2018.5.26 돌아가셨다. 설악산 절에서 지내고 시를 읊었던 선승이셨다.

만해를 알린 시인스님이셨다. "항상 진리에 배고파하고, 어리석어라" 하시며 아름다운

선시를 남겼다. '밤하늘 먼 바다 울음소리를 듣노라면 천경(千經) 만론(萬論)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라 하였다. 그의 시가 좋아서 몇 수를 적어서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이 계절에 훌륭한 선승 시인이 그의 법명 무산(霧山)처럼 홀연히 가셨다.

 

 

 

 

 

설악산 수렴동계곡 (2011.8.4)

 

 

 

 

   아득한 성자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 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떼

 

 

 

 

 

설악산 용아장성 운해 (2017.8.29)

 

 

 

 

  내가 나를 바라보니

 

 

무금선원에 앉아

내가 나를 바라보니

 

가는 벌레 한 마리가

몸을 폈다 오므렸다가

 

온갖 것 다 갉아 먹으며

배설하고

알을 슬기도 한다.

 

 

 

 

 

설악산 백담사에서 (2016.8.3)

 

 

 

 

  산에 사는 날에

 

나이는 뉘엿뉘엿한 해가 되었고

생각도 구부러진 등골뼈로 다 드러났으니

오늘은 젖비듬히 선 등걸을 짚어본다

 

그제는 한천사 한천스님을 찾아서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물어보았다

말로는 다할 수 없으니 운판 한 번 쳐보라, 했다

 

이제는 정말이지 산에 사는 날에

하루는 풀벌레로 울고 하루는 풀꽃으로 울고

그리고 흐름을 다한 흐름이나 볼 일이다

 

 

 

 

 

설악산 한계령에서 중청봉 가는 길 (2017.10.7)

 

 

 

 

  아지랑이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설악산 천불동계곡 (2011.1.24)

 

 

 

  무설설(無說說) 1

 

  강원도 어성전 옹장이

  김영감 장롓날

 

상제도 복인도 없었는데요 30년 전에 죽은 그의 부인 머리 풀고 상여 잡고 곡하기를

"보이소 보이소 불집 같은 노염이라도 날 주고 가소 날 주고 가소" 했다는데요

죽은 김영감 답하기를 "내 노염은 옹기로 옹기로 다 만들었다 다 만들었다" 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요

 

  사실은

  그날 상두꾼들

  소리였데요

 

 

 

 

 

설악산 봉정암에서 오세암 가는 길에 (2016.8.4)

 

 

 

   나는 말을 잊어버렸다

 

 

내 나이 일흔둘에 반은 빈집뿐인 산마을을 지날 때

 

늙은 중님,하고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더니

예닐곱 아이가 감자 한 알 쥐여주고 꾸뻑, 절을 하고 돌아갔다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산마을을 벗어나서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사나 했더니

그 아이에게 감자 한 알 받을 일이 남아서였다

 

오늘은 그 생각 속으로 무작정 걷고 있다

 

 

 

 

 

설악산 봉정암 사리탑에서 보는 일몰 (201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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