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오현의 시 '아득한 성자' 외
조오현시인이 2018.5.26 돌아가셨다. 설악산 절에서 지내고 시를 읊었던 선승이셨다.
만해를 알린 시인스님이셨다. "항상 진리에 배고파하고, 어리석어라" 하시며 아름다운
선시를 남겼다. '밤하늘 먼 바다 울음소리를 듣노라면 천경(千經) 만론(萬論)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라 하였다. 그의 시가 좋아서 몇 수를 적어서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이 계절에 훌륭한 선승 시인이 그의 법명 무산(霧山)처럼 홀연히 가셨다.
설악산 수렴동계곡 (2011.8.4)
아득한 성자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 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떼
설악산 용아장성 운해 (2017.8.29)
내가 나를 바라보니
무금선원에 앉아
내가 나를 바라보니
가는 벌레 한 마리가
몸을 폈다 오므렸다가
온갖 것 다 갉아 먹으며
배설하고
알을 슬기도 한다.
설악산 백담사에서 (2016.8.3)
산에 사는 날에
나이는 뉘엿뉘엿한 해가 되었고
생각도 구부러진 등골뼈로 다 드러났으니
오늘은 젖비듬히 선 등걸을 짚어본다
그제는 한천사 한천스님을 찾아서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물어보았다
말로는 다할 수 없으니 운판 한 번 쳐보라, 했다
이제는 정말이지 산에 사는 날에
하루는 풀벌레로 울고 하루는 풀꽃으로 울고
그리고 흐름을 다한 흐름이나 볼 일이다
설악산 한계령에서 중청봉 가는 길 (2017.10.7)
아지랑이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설악산 천불동계곡 (2011.1.24)
무설설(無說說) 1
강원도 어성전 옹장이
김영감 장롓날
상제도 복인도 없었는데요 30년 전에 죽은 그의 부인 머리 풀고 상여 잡고 곡하기를
"보이소 보이소 불집 같은 노염이라도 날 주고 가소 날 주고 가소" 했다는데요
죽은 김영감 답하기를 "내 노염은 옹기로 옹기로 다 만들었다 다 만들었다" 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요
사실은
그날 상두꾼들
소리였데요
설악산 봉정암에서 오세암 가는 길에 (2016.8.4)
나는 말을 잊어버렸다
내 나이 일흔둘에 반은 빈집뿐인 산마을을 지날 때
늙은 중님,하고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더니
예닐곱 아이가 감자 한 알 쥐여주고 꾸뻑, 절을 하고 돌아갔다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산마을을 벗어나서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사나 했더니
그 아이에게 감자 한 알 받을 일이 남아서였다
오늘은 그 생각 속으로 무작정 걷고 있다
설악산 봉정암 사리탑에서 보는 일몰 (201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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