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길 시'성탄제' 외
김종길 시인이 어제 2017.4.1 돌아가셨다. 그는 1926년 안동시 임동면 지례에서 태어났다. 그의 시에는 유가적인 분위기에다가, 서구의 이미지가 묻어있다. 처음 발표한 시 '성탄제'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오랫동안 실려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밖에도 '하회에서','춘니', '설날 아침에', '가을' 등 귀에 익숙한 시들이 있다. 그의 시에는 가족에 대한 정이 묻어나고, 고향 냄새가 난다. 그의 시는 한해가 오가는 겨울에 읽는다면 감흥이 더 난다. 아름다운 시를 세상에 남기고 꽃이 피는 봄날 또 한 분 훌륭한 시인이 가셨다.
성탄제(聖誕祭)
어두운 방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하회(河回)에서
냇물이 마을을 돌아 흐른다고 하회(河回),
오늘도 그 냇물은 흐르고 있다.
세월도 냇물처럼 흘러만 갔는가?
아니다. 그것은 고가(古家)의 이끼 낀 기왓장에 쌓여
오늘은 장마 뒤 따가운 볕에 마르고 있다.
그것은 또 헐리운 집터에 심은
어린 뽕나무 환한 잎새 속에 자라고,
양진당(養眞堂) 늙은 종손의 기침 소리 속에서 되살아난다.
서애(西厓)대감 구택 충효당(忠孝堂) 뒤뜰,
몇 그루 목과나무 푸른 열매 속에서,
문화재관리국 예산으로 진행 중인
유물전시관 건축공사장에서
그것은 재구성된다.
설날 아침에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 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메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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