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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곡 산 방 ( 鄕 谷 山 房 )

역사와 문화가 있는 풍경/강원 충청 탐방

청령포 / 영월 단종 유배지

향곡[鄕谷] 2018. 9. 25. 21:34




청령포 (淸泠浦) / 영월 단종 유배지

국가지정 명승 제50호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2018.9.24)






청령포 / 삼면은 강이, 서쪽은 험준한 절벽이 막고 있는 유배지였다



단종이 유배되었던 영월 청령포로 갔다. 잠시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청령포는 남,동,북은 강이 막고,

서쪽은 육육봉 험준한 절벽이 막아선 유배지다. 청령(淸泠)의 령(泠)은 '차다'는 뜻도 있지만 '쓸쓸

하다'는 의미도 있다. 차고 쓸쓸한 유배지였다. 세종 뒤를 이은 문종은 병약하여 재위 2년 3개월만에

세상을 뜨고, 12살 단종이 조선시대 제6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단종의 어머니는 세자빈일 때 단종을

낳고 다음날 세상을 떴다. 단종은 태어날 때부터 기구한 운명이었다.


수양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가혹한 정치 보복을 하였다. 사육신과 금성대군이 단종을

복위하려 했다 하여 단종은 노산군과 서인으로 두 번이나 강등되고, 끝내 불귀의 객이 되었다.

세조실록에는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내리는 어명을 지체하자 단종이 스스로 끈으로 목을 메고

죽었다고 적었다. 실제는 군사가 달려들어 그랬다는 것이 알려진 내용이다. 단종의 시신은 강에

버렸고, 이를 수습한 사람은 그 고장 호장 엄홍도였다. 그는 시신을 수습하고 잠적했다. 60년 뒤 

중종 때 봉분을 발견하였고, 다시 180여 년 뒤 숙종 때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숙종이 단종과

사육신의 명예를 회복시키면서 수양대군의 쿠데타는 명분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단종이 한양쪽을 바라보려 올랐던 노산대에 섰다. 단종은 여기서 부인(정순왕후)을 그리고, 부인은

동망봉(현 서울 숭인동 소재)에서 영월쪽을 바라보며 단종을 그렸다. 안타깝고 힘든 세월이었다.

계유정난은 모든 질서를 무너뜨렸다. 왕조의 질서를 무너뜨려 군신유의를 강조하던 충의는 허울

이고, 동료의 처자를 노비로 삼아 예를 무너뜨렸다. 공신들을 양산하여 특권은 늘고, 공신전 지급

으로 줄어든 세입은 백성의 부담이 되었다. 공신 자손은 큰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도록 법을

허물어 백성의 한은 깊어지고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누구는 신의을 택하고 누구는 실리를 택했다.

세월이 흘러 그 패륜의 실리는 깊고 쓰린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노산대 바위에 들꽃이 가련한

단종처럼 서 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 들꽃이 흔들린다.


     

※ 단종(1441.7.23~1457.10.24) : 조선 제6대 왕. 재위 1452.5.18~1455.6.11






청령포




청령포 소나무숲




단종어소 / 단종이 유배되어 머물던 곳을 승정원 기록을 참고하여 다시 세웠다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비 / '단종이 이곳에 계실 때 옛터이다'라는 뜻으로

영조대왕 친필을 검은 돌에 음각하여 새겼다. 영조 39년(1763년)에 세웠다.




단종어소 담장 안으로 휘어져 들어온 소나무

 



행랑채 / 궁녀와 관노들이 살던 집을 재현하였다

 




관음송 / 수령 600년 소나무로 단종 유배시 60년으로 추정하며, 단종이 두 갈래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전설이 있다




노산대 / 단종은 이곳에 올라서 한양 방향을 바라보며 정순왕후를 그렸다고 전한다




노산대에서 내려다 본 강물




노산대에서 바라본 강물과 서쪽을 막고 선 육육봉




금표비 / 청령포금표라고 썼다. 영조의 친필이며 유배지의 훼손을 막기 위해 영조2년(1726년)에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