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회화나무
사도세자 죽음을 지켜본 나무
회화나무 / 창경궁 (2019.6.28)
봄이 다 지나가고 여름이 올 즈음 창경궁으로 갔다. 창경궁 정문에 들어서면 옥천교 돌다리가 있다. 아버지가 서울 동숭동에 있는 대학교에 다닐 때 625 동란이 일어나자 한강다리가 끊어지고 피할 데가 없어 3일간 숨었던 곳이 옥천교 돌다리 밑이라 하였다. 그 돌다리 밑을 들여다 보았다. 살구나무가 부근에 있어 익어서 떨어진 살구를 주으러 다리 쪽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쟁중에는 보통 사람들이나 인민군이 살구를 주우러 내려갈 정도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창경궁 정문으로 들어서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한 바퀴 돌면 끄트머리 선인문 부근 넓은 터는 한 때 동물원이 있었던 곳이다. 동물원 뿐만 아니라 궁궐 밖 원남동 쪽에서 보면 놀이비행기도 보였다. 그 선인문 있는 곳 개울 옆에는 나무 줄기가 다 비어 받침대를 세워놓은 회화나무가 있다. 300년은 된 나무이다. 회화나무는 주나라때 정승들이 그 나무 밑에서 정사를 논의하던 나무였고, 선비들이 집집마다 심어 학자수라 부르던 선비의 나무였다. 나무줄기가 힘차고 자유롭게 뻗어 선비의 기개와 학문의 자유를 나타낸다고 그렇게 불렀다.
그런데 이곳 창경궁 선인문 앞 회화나무가 유독 관심을 끄는 것은 조선시대 영조 38년(1762년) 사도세자가 죽어 이 문으로 나갔고, 그 비극을 보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속이 다 썩어 비게 되었다고 말한다. 원래 회화나무는 궁궐의 권위를 상징한다. 창덕궁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큰 회화나무 세 그루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볼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