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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곡 산 방 ( 鄕 谷 山 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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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자취

향곡[鄕谷] 2020. 1. 23. 13:53

 

 

2020 강진, 장흥, 해남 탐방 ⑪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자취

 

전남 해남군 (2020.1.14)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은 해남 윤 씨 어초은공파 녹우당 집안의 유물을 전시하는 곳이다. 국보인 윤두서 자화상, 보물인 고화첩, 종가문적, 노비문서가 대표적이다. 이곳을 대표하는 사람은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와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이다. 공재는 고산의 증손자이고, 제사를 폐했다고 천주교 박해의 대상이 되어서 순교한 윤지충(尹持忠 1759-1791)은 공재의 증손자이다. 

 

윤선도는 서울 명동에서 태어났다. 양주에 별장이 있었는데, 홍수가 나도 별장이 있던 재산은 섬처럼 홀로 남아 사람들은 이 산을 고산(孤山)이라 했다. 지금은 남양주시 수석동으로 행정명이 바뀌었다. 윤선도는 이 산이 고고함과 외롭고 고독했던 자신의 인생과 닮았다고 해서 자호로 삼았다. 고산은 조선 중기 국문학의 큰 봉우리다.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 산수의 미를 아름답게 엮어낸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잠시 벼슬에 나갔으나 보길도에서 삶을 마감했으니 그의 문학처럼 살았다.

 

윤두서는 녹우당에서 나서 녹우당에서 죽었다. 그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었다는 중용에서 공손할 공(恭)을 취해 호를 삼았다. 공(恭)은 선비가 갈고 닦아야 할 덕목 중 하나라 생각하였다. 선비화가인 공재 윤두서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더불어 조선 후기 3재라 불렀다. 풍속화와 진경산수화를 최초로 선보였고, 사실주의 화풍도 개척하였다. 그의 자화상은 전후 후무한 그림으로 43세 때 그린 얼굴이라는데, 집안의 상례 등 현실적 제약으로 이상을 실천할 수 없었던 내면의 감정을 눈빛에서 느낄 수 있다. 그밖에도 그가 그린 천하지도가 있고, 동국여지지도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보다 150년 앞서 그린 지도로 대마도가 들어있다. 뭇 기술을 익히고 천문을 살피며 실용학문을 공부한 공재는 다산의 외증조부로 그의 학문적 세계관은 다산에게 영향을 미쳤다. 다산이 유배와 있으면서 이 집에서 소장한 많은 책들을 가져다 보았다.

 

고산유적지에 다녀오면서 답사여행의 숙제가 늘었다. 시조집인 산중신곡과 한문 수필집 금쇄동기의 내용과 무대를 더 알아야 하고, 공재의 그림을 더 볼 필요가 생겼다. 그리고 금쇄동이 궁금해졌다. 9년간 은거하며 오우가가 있는 산중신곡의 무대인 금쇄동은 보길도와 더불어 문학적 산실이고, 평소 고산이 봐두었던 천하명당이라며 은거하였고 묻힌 곳이라 더 궁금하다.   

 

 

 

고려시대 노비문서

 

 

경모첩 / 유묵을 편집한 서간첩

 

 

녹우당 현판 / 동국진체 글씨의 원조로 알려진 옥동 이서의 글씨

 

 

 

지봉유설 / 저자 이수광의 증손녀가 공재 윤두서의 부인이다

 

 

 

규한록 / 종부 광주이 씨가 시어머니께 쓴 편지글

 

 

금쇄동집고 / 고산이 이백,백거이 등 중국 시인들의 시를 묶은 첩 

 

 

산중신곡 / 오우가 등 금쇄동에서 지은 시조집

 

 

공재 윤두서 자화상

 

 

 

 

 

 

공재 윤두서 그림

 

 

 

천하지도

 

 

 

동국여지지도. 제주도는 왼쪽에, 오른쪽에는 대마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