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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과 숲 24. 남양주 광해군묘(光海君墓)

향곡[鄕谷] 2022. 1. 4. 21:39

왕릉과 숲 24

 

남양주 광해군묘(光海君墓)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 59

 

 

광해군묘(光海君墓) : 조선 15대 광해군 (선조 둘째 아들. 1575.4-1641.7(66세), 재위 15년 1개월(1608.2-1623.3))과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류(柳)씨(1577-1623.46세)의 묘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후궁 공빈 김 씨에게서 태어났다. 선조가 서얼 출신으로 왕위를 이었기에 적자 계승을 위해 정비로부터 아들을 기다렸지만 아들 14명이 모두 후궁 소생이었다. 선조가 죽기 3년 전에 계비 인목왕후는 영창대군을 낳았다. 영창대군을 낳은 뒤 후사 문제로 시끄러웠다. 소북파는 광해군은 서자라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아야 한다고 했고, 대북파는 영창대군은 너무 어리니 광해군이 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여 붕쟁이 격화되었다. 그러다가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역모를 일으켰다는 고변이 있어 김제남을 사사하고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하고 강화도에 위리안치하였다가 죽였다. 선조는 권력기반이 약화될 것을 두려워 세자 책봉을 계속 미루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공빈 김 씨가 낳은 맏이 임해군은 성격이 난폭하여 세자 후보에서 제외하였고, 임진왜란으로 도망가기 바쁜 선조는 서둘러 광해군을 세자로 결정했다. 안으로는 권력을 독점하려는 소북파가 광해군을 흔들었고, 밖으로는 명나라가 세자 책봉과 원군 파견을 가지고 숭명(崇明)에 거리를 둔 광해군을 흔들었다. 

 

선조가 죽자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대동법을 실시하고, 소실된 서적을 간행하고, 국조보감과 허준의 동의보감 등을 편찬하고 외래 문물 보급에도 긍정적이었다. 만주에서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하자 광해군은 국방을 강화하는 조치를 하였다. 후금과 전쟁을 하던 명나라에서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자 강홍립으로 하여금 후금에 투항케 하여 명의 강요에 의해 출병하였으나 우호를 거스를 의향이 없음을 알려서 화의를 맺는 등 실리외교를 펼쳤다.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는 광해군과 대립하여 덕수궁에 갇혀 지내며 험란한 정치역정을 보낸다. 그러다가 대왕대비 자격으로 인조반정을 허락하여 광해군을 폐위하였다. 인조반정은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명분을 내세웠으니,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렸다는 것과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정 명목은 허울이었다. 명나라와 거리를 둔 것은 나라의 안위를 위한 정책이었고, 영창대군을 유배 보내고 죽인 의사결정권자는 선왕 선조였기 때문이다. 반정에 의해 폐위된 연산군과는 평가가 다르다. 오히려 인조는 소현세자 독살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소현세자의 가솔들을 유배 보내고 참살하는 것으로 보아 인조가 배후일 것으로 보는 것이다. 광해군은 연립정권을 구성하여 전후 복구에 나섰으나 문묘종사라는 현안에 각 당파와 이해조정을 하지 못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문묘종사란 성균관 문묘에 공자와 함께 제사 지내는 사람을 정하는 문제인데, 그 대상을 정하는 것이었다. 스승의 명예를 위해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현실정치에 불만을 가진 서자 7명이 일으킨 칠서서옥도 역모로 비화되고, 이를 추궁하면서 권력 독점과 강경파에 대한 당론 조절에 실패하여 결국 반정으로 무너졌다.

 

폐위된 광해군과 폐비, 폐세자, 폐세자빈은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외아들인 폐세자는 사약을 받고, 폐세자빈은 자살하고, 폐비 류 씨는 1년 7개월 만에 화병으로 죽었다. 홀로 된 광해군은 강화도에서 제주도로 유배지가 바뀌었다. 청나라에 굴복한 인조가 광해군 복위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유배지에서 살면서 문간방으로 쫓겨나도, 종이 구박하여도 18년간 초연하게 살다가 예순여섯에 죽었다. 죽기 전에 어머니 묘 부근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하였다. 광해군묘에서 어머니 공빈 김 씨 묘(성묘)가 보였는데, 지금은 나무가 우거져 겨울에도 보이지 않는다. 광해군묘는 경춘선 금곡역에서 3.4㎞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다. 주변은 공원묘지가 들어섰고, 철책에 둘러싸인 외롭고 답답한 공간이다. 정문도 재실도 없으며, 봉분에 비해 묘터는 비좁다. 식생은 소나무와 굴참나무 등 참나무 종류가 대부분이다. 조선왕릉인데 세계문화유산에서 제외하였다. 역사에서 엄연한 왕이고, 정치적 이해가 달라 폐위된 왕인데 대접이 참으로 소홀하다. 왕릉 중 안내 팜플랫이 없는 곳이 이곳뿐이었다. 세계문화유산에 추가 등재하여도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동안 다른 왕릉처럼 관리를 못하여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못했는지는 모르겠다. 비공개 묘라 허가를 받고 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전에 허가받았다고 하여도 길이 없어 뒤로 난 철문 잠금장치를 열어야 들어갈 수 있다. 공개를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시대를 앞서갔지만 신하를 설득하지 못하고, 통합에 실패한 폐주의 공간은 이렇게 쓸쓸하다. 광해군묘 뒤 봉우리가 세상의 소리를 듣는다는 뜻인 관음봉이다. 자리 잡은 위치가 묘하다. 

 

 

※ 광해군묘는 사릉관리사무소(031-573-8124)에 사전에 전화로 신청한 후 당일 방문하여 신청서를 작성한 뒤 직원과 동행하여 들어갈 수 있다.

 

 

 

철망 안으로 광해군묘가 보인다(지금은 연두색 철망을 바꾸었다)

 

 

광해군묘 (광해군(좌)과 문성군부인(우) 묘)

 

 

 

광해군묘

 

 

 

광해군묘(문성군부인묘) .비석의 무늬곡선이 다르다. 장명등 중간과 아래가 파손되었다

 

 

 

광해군묘. 묘터는 비좁고 들어오는 길이 보인다

 

 

 

광해군묘. 문인석은 마모되었다. 오른쪽 망주석 윗부분은 없어졌고, 왼쪽 망주석은 동강난 부분을 찾아와 붙였다.

 

 

 

좁은 묘터 앞에 소나무 많다. 부근 바닥은 말끔히 정리를 하여 방화선 역할을 하고 있다

 

 

 

광해군묘. 계단을 올라가서 서 있을 공간이 비좁다.

 

 

 

광해군묘에는 굴참나무가 많다

 

 

 

몇 년 전만 하여도 광해군묘 들어가는 길은 좁은 오솔길이었다 (2016.4.3)

 

 

 

광해군묘 출입은 능 뒤 철문을 통하여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