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향 글향이 있는 산방

산을 걷고 길을 걸으며 세상을 배웁니다

향 곡 산 방 ( 鄕 谷 山 房 )

역사와 문화가 있는 풍경/고궁 능묘 산사

왕릉과 숲 26. 남양주 홍릉과 유릉 1. 홍릉(洪陵.고종)

향곡[鄕谷] 2022. 1. 7. 20:54

왕릉과 숲 26

 

남양주 홍릉과 유릉 1. 홍릉(洪陵. 고종)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홍릉(洪陵) : 조선 26대 고종(高宗: 흥선대원군 둘째 아들. 1852.7-1919.1(67세). 재위 43년 7개월(1863.12-1907.7))과 명성(明成) 왕후 민(閔)씨 (1851-1895.44세) 능 (합장릉)

 

 

 

홍릉과 유릉은 경춘선 금곡역에서 1㎞ 정도 된다. 명성왕후는 일제 군사에 의해 시해되어 청량리 천장산 부근에 능역을 조성하여 능호를 홍릉이라 하였다. 나중에 고종이 세상을 떠나 남양주시 금곡에 능역을 잡아 산역을 하면서 홍릉에 있는 명성왕후를 이장하여 합장하였다. 청량리 홍릉은 이장 후에도 그대로 홍릉이라 부르고, 고종 부부가 묻힌 이곳도 왕후의 능호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홍릉이다. 입구에는 키가 큰 가문비나무, 전나무, 수양버들이 있고, 노각나무와 히어리 열매가 아름답다. 노각나무는 껍질이 황갈색 모자이크 모양인데 어린 나무여서 그런지 모자이크 문양은 없이 그냥 황갈색이다. 히어리 열매는 마르면 2개로 갈라지면서 씨가 튕겨나가는데 언제 튕길지 탱탱하다. 고종은 감을 좋아하여 경복궁에 있는 감나무에 고종시(高宗枾)란 이름을 붙였는데, 이곳 홍릉 재실에도 감나무가 있다. 재실을 지나면 향나무가 줄 서 있는 뒤로 석물들이 2열로 서 있다. 대한제국 황제릉 형식이라는데, 일제 때 조성한 능으로 명나라 황제릉의 형식을 따랐다. 고종은 살아생전 만동묘를 부활시켜 스스로 명나라 신하로 격하시킨 바 있다. 석물은 이국적인데 왕릉에서 볼 수 없는 기린, 코끼리, 사자, 해치, 낙타도 있다. 문무인석은 키가 크고 몸체는 사각이고 날씬하며 무표정하다. 왕릉에 전통적으로 세운 정자각 대신 명나라 황제릉을 따라 一자형으로 된 큰 침전을 세웠다. 왕릉은 너무 높아 앞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조선 왕은 후대에 오면서 정비가 낳은 후사는 찾기 귀하고, 후궁에서도 후사를 얻기가 어려웠다. 23대 순조가 얻은 유일한 아들 효명세자는 일찍 잃었고, 24대 헌종도 후사가 없어서 사도세자의 후궁 숙빈 임 씨에게서 얻은 맏아들 은언군 방계 혈통을 강화도에서 찾아 25대 왕(철종)으로 앉혔는데, 또한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역시 사도세자의 후궁 숙빈 임 씨가 낳은 둘째 아들 은신군의 방계 혈통에서 찾았으니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 씨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이 고종이다. 세도정치에 억눌려 지냈던 조대비가 흥선대원군과 의기투합하여 급하게 고종을 왕위에 앉혔다.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고, 대원군에게 섭정을 위임하여 흥선대원군이 10년 동안 정사를 맡았다. 고종 3년에 흥선대원군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 씨 천거로 왕비를 구하였으니 명성왕후 민 씨다. 여덟 살에 부모를 여의고 자란 민비를 왕비로 맞은 것은 외척을 막겠다는 흥선대원군의 의지 때문이었는데, 후에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첨예하게 맞섰으니 뒷일을 어찌 알겠는가.

 

섭정을 맡은 흥선대원군은 개혁정치를 하다가 경복궁 중건으로 민생을 어렵게 하는 패착을 하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시작된  쇄국정책 때 환곡제로 민심을 잃고, 호포제, 서원철폐로 원성을 듣자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다. 그 뒤 일본이 강화도에 나타나 개방을 요구하여 1876년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고종은 침략이 아니라 교린이라 생각하고 대원군에 반대하는 정책만 하여 문호 개방에 집착하였다. 공론화 과정 없이 개화를 하면서 고종을 비판하는 상소가 이어지고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군인들을 박대하는 것은 표면적 이유였고, 일본의 조선 지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민비는 민심을 외면하다가 충주 장호원으로 쫓겨갔다. 잠시 대원군이 등장하였으나 지원하러 온 청나라가 대원군을 납치하여 고종이 다시 집권하였다. 고종은 일련의 사건에서 죽은 일본인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군 주둔을 허용하는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런 정국에 위로부터 개혁을 주도하던 개화당이 우정총국 낙성식에서 민 씨 척족 세력의 친청 수구파를 제거하는 갑신정변이 일어났으나 청국에 출병을 요청하여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고종은 부국강병 하고자 하는 개화파를 제거하여 개혁의 동력을 무너뜨렸다. 고종은 놀기를 좋아해 밤새 놀고 오후에 궁궐에 나왔고, 명성왕후는 수령직을 팔아 축재를 하였다. 농민들은 동학을 조직하여 지배층에 변화를 요구하는 혁명을 일으켰다. 혁명군은 개혁을 요구하며 청군 파병을 요청했고, 일본도 조약에 따라 즉각 파병했다. 일본군이 들어오며 고종은 조선군을 무장해제시켰다. 고종은 갑오경장으로 개혁을 단행해 정국의 변화를 꾀하였으나 동력은 이미 떨어졌다. 일본군이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나고, 유폐된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1년 동안 피신하는 아관파천(1896.2.11)을 하였다. 민비가 쫓아낸 엄상궁을 고종은 민비 시해 5일 만에 다시 불러들여 같이 러시아공관으로 갔다. 엄상궁은 나중에 영친왕을 낳아 실질적 계비이나 혼례를 올리지 못하여 엄귀비로 남았다. 엄귀비가 묻힌 곳은 청량리 홍릉 부근 영휘원이다.

 

러시아공관에서 1년 만에 돌아온 고종은 나라를 일신하고자 대한제국이라 하고 왕은 황제라 칭하였으나 기울어지는 나라를 구하기는 힘겨웠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조선을 식민지로 하는데 동의를 받아 을사조약을 맺어 외교권을 빼앗았다. 고종은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대외로 알리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5년 뒤에는 조선을 강점하였다. 나라를 열강에게 내놓으며 외세에 의존하였던 한계가 드러났다. 고종은 왕으로서 자질이 부족하였고, 왕권에 집착하면서 통치는 오락가락하고, 외교적인 중요 의사결정은 혼자 하였다. 시대변화를 거부하여 수시로 돌변하여 몇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강국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나중에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친일파에 기대었다. 결국 나라는 망하였고, 백성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고종은 합병 후 일본 왕족 대우를 받으면서, 합병에 찬성한 벼슬아치들이 작위와 재산을 받는데 대하여 대단히 관대한 조건이라 하였다. 망국의 왕으로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을 죽을 때까지 보인 왕이었다.

 

 

 

 

 

전나무(좌)와 독일가문비나무(우)

 

 

 

노각나무 열매

 

 

 

히어리

 

 

 

연지

 

 

재실과 향나무

 

 

 

홍릉 재실

 

 

 

감나무. 고종은 감을 좋아하여 경복궁에 있는 감나무에 고종시란 이름을 붙였다

 

 

 

홍릉. 대한제국 황제릉 형식으로 명나라 황제릉 형식을 따랐다

 

 

 

홍릉 석물. 키가 크고 몸체는 사각이다

 

 

 

홍릉 석물

 

 

 

지당 / 물을 가두어 놓는 곳

 

 

 

향나무와 침전. 다른 왕릉에 있는 정자각 대신에 ―자형 침전을 세웠다.

 

 

 

홍릉(합장릉)

 

   

 

홍릉수목원 안 홍릉터

 

 

 

아관파천을 한 구 러시아공사관 남은 건물

 

 

 

고종 후궁 엄귀인(영친왕 생모)가 묻힌 영휘원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