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과 숲 25
남양주 흥선대원군 묘(興宣大院君墓)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 22-5
흥선대원군 묘 (興宣大院君墓) : 흥선대원군(이하응. 제26대 고종의 아버지. 남연군의 아들. 헌의 대원 왕(獻懿大院王. 1820-1898. 78세)과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 민(閔)씨(순목 대원 비(順穆大院妃. 1818-1897.80세) 합장묘
대원군이란 왕위를 계승할 후사가 없어 종친 중에서 왕위를 계승할 경우, 왕의 아버지에게 주는 호칭이다. 흥선대원군은 영조의 현손이며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 이진의 후사요 남연군의 아들로 헌종 때 흥선군에 봉하였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대왕대비 조 씨의 명으로 흥선군 하응의 2남 명복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고, 하응은 흥선대원군이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대원군 호칭을 받은 사람은 넷이다. 셋은 죽은 뒤 추존하였고, 흥선대원군만 생전에 받은 대원군이어서 대원군하면 흥선대원군을 연상한다. 대원군의 거처는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운현궁이었다.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다. 1863.12월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흥선대원군은 여기에서 정치를 하였다.
대원군이 되기 전에는 조지서 제조 등 한직을 거치며 멸시를 이겨내고 정 2품 오위도총부 도총관까지 거쳤으니, 야사에 나오는 실제 길바닥의 불우한 비렁뱅이는 아니었다. 대원군은 풍수상 좋다 하여 연천에 있던 남연군묘를 충청도 덕산 대덕사로 옮겼다. 그는 어린 아들 고종이 왕위에 앉자 개혁의 칼날을 휘둘렀다. 전국의 서원은 47개만 남기고 철폐하고, 국가권력을 독식하던 비변사에서 의정부를 독립시켜 노론이 장악한 국가기구를 개혁하였다. 과거부터 지속된 삼정(三政) 문란도 손을 대었다. 삼정인 농지에 대한 세금인 전정(田政), 병무행정인 군정(軍政), 빈민구제 행정인 환곡(還政)을 개혁하여 양반도 세금을 내게 하고 백성의 세금은 줄이도록 하였다. 왕권강화 틀 속에서 경복궁을 중건하기 시작하였으니 백성은 대원군을 원망하기 시작하고 민생은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농민항쟁은 커지고 동학은 왕성하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가 세력을 넓히려고 남하하기 시작하자 대원군은 천주교를 이용하려 막고자 하였으나 프랑스 주교가 입장을 바꾸자 천주교 대박해를 하여 프랑스 선교사와 8천여 조선인 신자가 죽었다. 이에 강화도로 프랑스군이 들어와 외규정각도서를 약탈하여 퇴각하는 병인양요(1866년)가 일어났다. 평양 대동강에서는 미국 제네랄셔먼호 선원이 우리의 화공으로 몰살하자 미국이 공격한 신미양요(1871년)가 발생하여 조선군 350명이 전사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책을 강화하였다. 대원군은 막대한 군사비 조달을 위해 환곡제를 실시하자 경복궁 중건에 이은 민생의 어려움으로 백성의 지지를 잃고, 호포제와 서원 철폐로 양반의 지지도 잃었다. 이때 같은 쇄국론자인 최익현이 대원군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자 마침내 스물한 살이 된 고종은 1873년 친정을 선포하고 창덕궁에서 운현궁으로 통하는 문을 막아버렸다. 대원군은 섭정 10년 만에 물러났으며, 1882년 임오군란으로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청나라 군대에 납치되어 천진에서 3년간 유폐 생활을 하였다. 1885년 귀국하여 원세개와 협력하여 재기를 노리고, 며느리인 명성왕후와 갈등을 하고, 정권을 잡으려 애를 썼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흥선대원군 묘는 왕릉은 아니지만 실제 섭정을 하여 왕조에 미치는 영향이 커서 찾아보기로 하였다. 흥선대원군묘는 경춘선 마석역에서 1.6㎞ 거리에 있다. 경춘국도 마석교 부근부터 갈림길마다 흥선대원군묘 표지판이 있어 길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 처음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죽자 경기도 고양에 묘를 조성하였다가 이듬해 대원군이 죽자 합장하였다. 그 뒤 경기도 파주로 옮겼다가 1966년 지금 자리로 다시 옮겼다. 민가가 끝나는 곳에 차를 세우고 걸어갔다. 한가한 길을 조금 걸으면 철문으로 막아놓은 곳에 흥선대원군묘 표지석이 서 있다. 철문 옆으론 사람들이 다닐 공간이 있다. 이곳은 따로 왕릉관리소에서 관리하지는 않았다. 산길로 들어서서 조금만 걸으면 묘역이다. 묘역은 상하 2단으로 간략하게 조성하였다. 봉분 둘레에는 석호와 석양이 한 쌍씩 있고, 바깥에 곡담으로 둘러 싸여 있다. 문인석은 이끼가 낀 것인지 시꺼멓고, 망주석은 총탄에 맞은 듯 깨진 흔적이 수두룩하다. 바로 앞엔 거북머리를 묘 앞으로 반쯤 돌린 신도비가 애매한 위치에 서 있다. 능역에 올라보니 멀리 천마산 줄기가 보인다. 조선말 거침없이 내달리던 대원이 대감이 여기 누워 있다.
대원군묘 옆에는 왕족의 무덤군이 있다. 올라가는 계단에는 들풀이 말라 있고, 석물들이 비좁게 서 있다. 비석을 보면 고종의 증조부인 은신군(恩信君), 대원군의 맏아들로 고종의 형인 흥친왕(興親王), 의친왕의 아들 이우공의 이름이 있다. 대원군의 손자 영선군(永宣君)은 조금 떨어진 입구에 있다. 흥친왕 이재면은 고종의 친형으로 한때 고종의 대안으로 검토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적장손 영선군 이준용도 고종을 폐위시키고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만년에는 모두 친일 성향을 보였던 인물이다. 이청공은 의친왕의 손자이며, 이우공의 아들로 왕실을 대표하는 인물로 최근까지 대학 교단에 섰고, 운현궁의 종주로 대원군 유산을 관리하였다. 왕족 중에 독립을 위해 가장 노력을 많이 한 분이 독립운동가 의친왕이고, 그 아들 이우 공도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하였던 인물이다. 이곳에 이름을 보니 대원군을 포함하여 왕릉관리소에서 관리를 하지 않는 이름들이다. 한때 풍운의 왕실 식구들이 모여 있다. 대원군은 권문세가의 그늘에서 그들을 떨치고 일어났으나, 경복궁 중건으로 왕조 붕괴를 앞당겼고, 쇄국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사람들은 말하길 쇄국이 시대착오라 할 테고, 대원군은 자구책이라 할 것이다. 대원군이 떠난 지 220여 년.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날씨는 차지만 햇볕이 따스하다. 잠시 목을 축이고 다시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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