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선사 선시 '우연한 노래'

경허(鏡虛)선사 선시

 

 

 

우연한 노래(偶吟)

 

노을 비낀 절 안에서

무릎을 안고 한가로이 졸다가

소소한 가을바람 소리에 놀라 깨보니

서리친 단풍잎만 뜰에 가득해

 

시끄러움이 오히려 고요함인데

요란하다 해도 어찌 잠이 안 오랴

고요한 밤 텅 빈 산 달이여

그 광명으로 한바탕 베개하였네

 

일 없음이 오히려 할 일이거늘

사립문 밀치고 졸다가 보니

그윽히 새들은 내 고독함을 알아차리고

창 앞을 그림자 되어 아른대며 스쳐가네

 

깊고 고요한 곳 이 산에서

구름을 베개하여 졸고 있는 내 행색

에헤라 좋을시고 그 가운데 취미를

미친 온 세상에 놓아두어라.

 

일은 있는데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워

나른해지면 이내 잠을 잘 뿐이다.

예부터 전해오는 이 글귀는

오직 이 문 앞에만 있을 뿐이다.

 

 

 

 

 

 

졸음(睡眠)

 

머리 숙이고 항상 조느니

조는 일 말고는 무슨 일이 또 있단 말인가

조는 일 말고는 다시 일이 없어

머리를 숙이고 항상 졸고만 있네

 

 

 

 

청산(靑山)

 

산은 절로 푸르고 물도 절로 푸른데

맑은 바람 떨치니 흰구름 돌아가네

종일토록 바위 위에 앉아서 노나니

내 세상을 버렸거니 다시 더 무얼 바랄건가

 

 

 

 

 

 

연암산(燕巖山)

 

연암산 눈옷 입은 아래

흰꽃과 같은 하루는 저물고

서동이 찾아와 내게 말하기를

밥북은 이미 울었노라고.

 

    *밥북(飯鼓) : 공양을 알리는 북소리 

 

 

 

 

매화(梅花)

 

눈 속에 얼어붙은 금교는 아직 안 열리고

계림에는 봄빛이 아직도 멀었는데

영리하다 청제는 재치가 많아

모랑의 집 매화에 먼저 와 있구나

 

   *금교 : 경주 서천에 있었던 다리

   *청제 : 봄을 주관하는 동쪽의 신(神)

   *모랑 : 일선군에 있는 모례라는 낭자의 이름

 

 

 

 

 

토굴가(土窟歌)

 

일만 일 모두가 꿈 아닌 일 없음을 홀연히 깨달아

주장자 짚고 물병과 바리때 둘러메고

깊은 구름 숲속으로 들어가노라

온갖 새 지저귀고

돌 틈으로 흘러내리는 샘물은 졸졸졸

천길 노송과 얽힌 칡덩굴 속에

두어칸 띠집을 짓노라

나의 벗으로는 이것뿐

때로는 구름과 안개에 나아가 노래하고

때로는 향 사르고 고요히 앉았으니

속세의 티끌이 다시는 침범하는 일 없도다

텅비고 심련한 한마음에

만 가지 이치가 소상히 들어나니

무릇 이것이 세상에 일등 사람이로다

술 가운데 산 신선의 술을 마시어 흠뻑 취하고

삼라만상을 한 인(印)으로 도장쳐버린 후

대머리 흙얼굴로 

풀언덕을 뛰놀면서

한 곡조 젓대소리로 노래하노니

니나리,니라리,늴리리야.

 

   *젓대 : 저(箸)의 다른 말. 가로 대고 부는 피리

 

 

 

두견새(杜鵑)

 

본래 태평한 천진부처여

밝은 달 아래 나무 위에서 울고 있노라

빈 산 밤은 깊고 사람마저 고요한데

오직 네 소리가 있어 동쪽 서쪽.

 

 

 

 

 금강산

 

 

한 지팡이로 그름 위에 솟아 서너 걸음 걸어보니

푸른 산 흰 돌 사이마다 기이한 꽃들

만약 화공으로 하여금 이 경치는 그릴 수 있겠지만

저 숲속에서 우는 새소리는 어찌할 것인가

산과 구름 함께 희니

구름과 산 모양 가려낼 수 없구나

구름은 흘러 돌아가고 산만 홀로 남으니

아름다운 일만이천봉

 

 

 

 

 꽃은 뜰에 진다

 

 

버들가지 흔들려 땅에 끌리고

제비와 꾀꼬리는 노닐다 가네

초가집의 시원한 맛을 고루거각에 비길까

시끄러운 천하사 모두 꿈인 것을

술통 앞에 취하는 진미 내 마음에 구하는 것 이것 뿐이네

두견새 우는 울타리 위에 청산은 깊고

꽃 지는 뜨락에는 햇빛도 그윽해라

풍광도 좋거니와 높은 벗 더욱 좋아

물 맑은 이 곳에서 잠깐 쉬어간들 어떠리오

 

 

 

 

 시비를 말라

 

 

누구 옳고 그른가

모두가 꿈속의 일이로다

북망산 아래

누가 너이고 누가 나이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