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놋그릇(유기) / 집안 생활정도의 한 척도였던 유물

향곡[鄕谷] 2022. 2. 4. 11:27

 

놋그릇(유기 鍮器)

집안 생활정도의 한 척도였던 유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맏이였던 나는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나무로 만든 제기(祭器)는 따로 주문하였지만 놋쇠로 된 밥그릇(주발)과 국그릇(대접)은 어머니가 물려주셨다. 나중에 어머니 돌아가시면 쓰라고 어머니 것까지 같이 주셨다. 예전에 집에는 놋그릇이 많았다. 종류별 식기류는 물론이고, 주걱, 화로, 부젓가락, 요강, 촛대, 재떨이 등이 놋쇠로 만든 생활용품이었다. 감자를 긁던 놋숟가락은 반쯤 닳았고, 놋 국자는 들기가 무거웠고, 널마루 밑에 들어가도 떨어진 놋젓가락을 주을 수 있었다. 놋그릇은 연탄이 들어오면서 녹청이 생기고 변질되어 관리하기가 힘들었다. 어느 날 그릇 장사들이 다니며 스테인리스 그릇과 바꿔준다 하니 어머니는 집안에 있던 놋그릇을 다 내주고 말았다. 어머니가 물려주신 놋그릇은 아버지가 교편 잡고 계실 때 나중에 부상으로 받은 그릇이다.

 

놋쇠는 구리에 주석이나 아연, 니켈을 섞은 합금이다. 놋그릇은 한자말로 유기(鍮器)이다. 청동은 놋쇠의 일종으로 서기전 7세기부터 사용하였지만, 7세기 무렵에 유기 제작기술이 페르시아에서 당나라로 유입되고, 8세기에 신라로 들어왔고, 고려시대에 불교용품과 생활용품에 널리 쓰이게 되었다. 식기류, 혼사 용구, 제사 용구, 불기류, 난방 용구, 등잔 용구 등 쓰임새가 많았다. 놋그릇은 주물 제작이 있고, 방짜(方字) 제작이 있다. 주물 제작은 틀에 부어 만드는 제작법이고, 방짜 제작은 쇳물을 녹여 쇳덩어리를 만들고 난 뒤에 여러 사람이 불에 달구어가면서 두드려 그릇의 형태를 만드는 방법이다. 방짜 유기는 1천 여 번 이상 매질을 해서 만드는 우리나라만 남아 있다는 기술이다.

 

그런 놋그릇을 우리 집에서는 제사나 명절 때만 꺼내 쓰지만, 제사가 많은 집에서는 수시로 꺼내고 관리해야 하니 정성이 여간 드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놋그릇의 질과 양의 관리상태가 그 집안의 생활정도를 가늠하는 한 척도였다. 그러니 때가 되면 가마니를 펴고 놋그릇을 꺼내서 닦았다. 암키와를 빻아서 가루를 내기도 하고 아궁이 재를 수세미나 짚에 묻혀 윤이 나게 닦았다. 윤기는 수고로움이었고 힘든 살림살이의 표시였다. 나중에 유약이 나와 그 수고를 조금 덜기는 했지만 여전히 놋그릇 윤내기는 정성이 필요한 일이다. 요즈음엔 식초를 떨어뜨린 물에 한참 담았다가 세제로 닦아 얼룩을 지운다. 그런 후 바싹 마르지 않은 놋그릇은 역시 얼룩이 생기니 정성을 들여 관리하여야 한다.  

 

그래도 놋그릇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놋그릇이 가져다주는 색은 중후함이 있고, 높은 보온성이 있고, 놋쇠가 주는 해독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식중독을 일으키는 원인균에 대한 살균성이 있고, 인체에 유익한 유기 염류를 함유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옛날에 어른들이 입안이 헐면 놋숟가락으로 먹으라 하였는데, 다 경험에서 나오는 얘기였다. 놋그릇에는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다. 비록 일상생활에서 조금은 멀어졌지만 오래 간직해야 할 귀중한 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