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궁(七宮)
왕을 낳았으나 종묘에 들지 못한 일곱 후궁 사당
서울 종로구 궁정동 (2023.10.16)
사적 149호
2022년 청와대를 개방하면서 북악산도 같이 개방하였다. 청와대 서쪽 담을 끼고 있던 칠궁도 출입 통제를 해제하였다. 칠궁은 조선시대 왕의 후궁 일곱 명의 신위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왕을 낳았으나 아들이 왕이 되기 전에 죽은 후궁들이다. 저경궁(儲慶宮)이라 쓴 건물은 밖에서 보면 지붕이 담에 걸칠 정도로 비좁다. 조선말까지만 해도 이곳엔 영조 생모인 숙빈 최씨를 모신 사당 육상궁(毓祥宮) 만 있었다. 1908년 서울 시내 후궁의 사당을 없앨 때 다섯 신위와 1935년 고종의 후궁 엄씨의 덕안군(德安宮) 신위를 합사 하면서 칠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 칠궁에 대한 얘기는 조선 19대 숙종에서 시작한다. 숙종은 6남을 두었다. 장남(경종)과 2남(요절)은 희빈 장씨 소생이고, 3남(요절), 4남(영조), 5남(요절)은 숙빈 최씨 소생이고, 6남(연령군)은 명빈 박씨 소생이다.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하여 50년을 왕위에 있었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영조 즉위 전에 세상을 떠났고 후궁 출신 빈이었기에 종묘에 들어 제사를 받지 못하였다. 영조는 어머니를 모실 사당을 영조가 자랐던 창의궁에 짓도록 명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고 현재 자리로 정한다. 이 사당은 처음에는 숙빈묘라 하다가 육상궁이라 바꾸었다. 육상궁 건립은 영조가 종묘에 어머니를 봉사하지 못하는 효의 표현이다. 정조 때는 육상궁 옆 냉천정에 영조의 영정을 봉안하여 생모를 모시는 의미를 나타내었다. 나중에 육상궁에는 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도 합사(연우궁)하여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같이 있게 되었다.
1908년 일제 침략이 한창일 때 순종은 예절을 번거롭게 하지 말고 혁신을 하라며 후궁 사당의 합사(合祠)를 지시하였다. 그것이 진정 왕의 뜻이었겠는가. 저경궁(儲慶宮) 에 선조 후궁 인빈 김씨, 대빈궁(大嬪宮)에 숙종 후궁 희빈 장씨, 연우궁(延祐宮)에 영조 후궁 정빈 이씨, 선희궁(宣禧宮)에 영조 후궁 영빈 이씨, 경우궁(景祐宮)에 정조 후궁 수빈 박씨가 들어왔다. 그리고 1935년 고종 후궁 엄씨의 덕안궁 신위를 합하면서 칠궁이 되었다. 궁은 원래 왕세자, 비빈의 거소를 이르나, 이들이 죽은 뒤에 살았던 곳을 그대로 사묘(祠廟)로 사용한 데에서 궁으로 부르게 되었다.
칠궁은 도로 확장과 청와대 건물을 추가로 세우면서 사당의 문과 건물 배치가 뒤로 물러나기도 하여 비좁게 되었다. 칠궁에 다른 궁 기둥은 사각인데, 희빈 장씨 신위가 있는 대빈궁은 둥글다. 한번 왕비에 있었기에 대접하려 그랬다는 것이다. 숙종 후궁 희빈 장씨는 투기로 숙빈 최씨를 죽이려 했는데 같은 공간에 들어가 있다. 사당은 나중에 옮겨서 합사 한 것이지만 원수지간인데 잘 지낼지 모르겠다고 쑥떡거릴 만하다. 나를 어렵게 하는 것은 내가 지은 악업이다. 결국은 다 만난다. 어찌하랴.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에서 북악산 방향으로 걸어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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