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속에 자연 44
살구꽃이 피면 백곡(百穀)을 심는다
살구나무는 3월 하순에서 4월 초에 꽃이 핀다. 꽃잎에 연분홍 빛이 살짝 비치는 꽃이다. 살구나무란 이름은 옛 이름 '살고'에서 유래하여 살구로 변했다. 살고의 의미에 대해서는 열매가 노란색을 뜻하는 '살(黃)'과 '고(명사화 접미사)'의 합성어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으나 정확한 어원을 알려져 있지 않다. 살구나무는 한자로는 행(杏)으로 쓰는데, 나무에 열린 열매가 아래로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이다.
살구꽃은 매화보다는 조금 늦게 핀다. 매화나무가 서재 앞에 자리 잡은 나무라면 살구나무는 살림집 울담 부근에서 볼 수 있다. 살구나무와 매화나무는 모두 장미과로 사촌지간으로, 잎보다 꽃이 먼저 피고 꽃 모양도 비슷하여 구별이 쉽지 않다. 차이점은 살구나무는 꽃받침조각을 뒤로 젖히고, 열매에서 과육이 잘 떨어지는 것이 매화나무와 다르다. 잎 가장자리는 살구나무가 불규칙적이라면 매화나무는 규칙적이다. 꽃향기는 매화가 짙은데 비해 살구꽃은 가볍게 은은하다.
청명(淸明) 전후에 살구꽃이 핀다. 그래서 청명 때 부는 바람을 행화풍(杏花風)이라 하고, 그때 내리는 비는 행화우(杏花雨)라 한다. 두목(杜牧)의 시에 '청명(淸明)'이 있다. 빗길을 가던 나그네가 목동에게 주막이 어딘지 물었더니, 목동이 살구꽃 핀 마을(杏花村)을 가리켰다. 그 뒤로 행화촌은 주막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조선시대 한양에 살구꽃이 많았다. 그래서 조선 후기의 문인 신위는 그가 지은 시에서 '대저 한양성 십만 호가 봄 오면 온통 행화촌이라네'라고 하였다.
공자가 유람할 때 제자들을 살구나무 아래서 가르쳤기에 강학하는 장소를 행단(杏壇)이라 한다. 공자 때 사용한 말은 아니며 후대에 만든 말이다. 중국 오나라 명의(名醫) 동봉(董奉)은 환자를 치료하고 돈을 받는 대신 살구나무를 심게 했다. 보리가 익을 무렵 살구는 노랗게 익는다. 살구가 익으면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 그 뒤로 살구나무 숲인 행림(杏林)은 인술을 베푸는 의사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살구는 약재로 쓰임새가 많아 살구나무가 많은 마을에는 염병이 돌지 않는다고 한다.
살구꽃이 필 무렵이면 농가에서는 봄일을 시작한다. 살구꽃은 파종을 알리는 신호이다. 그래서 "살구꽃이 피면 백곡(百穀)을 심는다"란 말이 있다. 농가에서는 절기가 있고 월령이 따로 있지만 꽃이 피고 지는 곳을 보고 농사에 연결하였다. 벚꽃이 지면 찻잎을 따기 시작하였고, 앵도가 잘 익으면 단오 때고, 찔레꽃 필 무렵이면 모내기가 한창 때고, 마타리 꽃이 피면 여름 끝자락이자 가을이 오고, 배롱나무 꽃이 지려할 때 가을 추수를 시작하였다. 살구 열매가 많이 달리는 해에는 병충해가 없어 풍년이 든다고 한다. 모쪼록 올 한 해도 살구꽃이 풍성하게 피기를 기대한다. 농부들이 관찰한 경험들은 오랜 기간 자연 속에서 얻은 경험이다. 경험만큼 좋은 스승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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